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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억의 산길

수석보다 더 아름다운 봉우리 모산재

 

신이 아니면 만들수 없는 조각 작품들 모산재는 수석 전시장이라고 해도 이견을 제시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봉우리의 어느 한 부분만 바라보면 금강도 설악의 한 부분과도 전혀 손색이 없어 아마 신라고찰

영암사지는 그래서 이 아름다운 산 아래 터를잡아 사방 불심을 심어 주었으리라.

모산재는 언제나 시끌벅적하다.

산 중턱에서 산 위에서 쉼없이 터져 나오는 감탄사로 모산재는 항상 시끄러운 산 이다.

 

 

3번이나 즐겁게 산행을 한 감암산 초입을 찾지못해 20여분을 헤며다 낮선객이 서성거리는것을 본 마을

분이 어떻게 왔느냐고 묻는다. 저기 저 산을타고 황매산으로 가고 싶은데 산길 초입을 찾지못해 헤며고

있다고 하자. 그 분 한참 망설이더니 등산로를 폐쇄 했다면서 나그네 대하는 모습이 영 달갑지 않다.

왜 등산로를 폐쇄했어요? "농작물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겨울에는 먹을게 없어 덜한데 가을철

에는 밤.대추.감 남아 있는게 없어요.도회지 양반들 돈 몇푼주면 쉽게 구할수 있는건데...혀를찬다.

이쯤되니 산객 더 이상 무엇을 물어 보겠는가?  발길을 돌리려고 하자 이왕 오셨으니 이쪽 길을 따라

가면 길이 나온다는걸 귀 뒷전에 흘리고 몇번 오른 모산재를 향해간다.

여름엔 계곡을 오염시켜 식수를 사용하는 마을 사람들의 분노가 극에 달한다는 그 분의 말씀

무분별한 산객들 곰 씹어볼 말 아닌가?  황폐해진 우리농촌 가슴으로 안아갈때다.

 

 

역시 모산재는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강한 바람이 산릉을 너울거리며 덮쳐 금방이라도 기암들을 아래로 밀어 떨어뜨릴 태세다.

파란하늘에 하얀 구름이 빠른 속도로 유영하고 여기 저기서 동료를 부르는 구두를 신고 산에 오른사람

들의 몰골이 영 성가시게 보이는것은 산을 우습게 보고 무모하게 덤벼드는 우둔함에 부아가 난다.

모산재는 능선까지 짧은 거리지만 직벽의 바위와 복병인 마사토가 있어 자칫하면 대형사고로 이어질

확률이 높은 산 인데도 산 아래서 놀다 삼라만상형의 기암괴석에 취한 행락객들이 무심코 구두 혹은

운동화를 신고 오르는걸 이곳에 오면 종종 볼수가 있다. 산을 대하는 자세는 언제나 겸손 그 자체다.

 

 

모산재는 이 땅 최고의 명당자리라 불리어진 무지개터를 가진 봉우리로 수십만평 철쭉군락지를 가진

아름다운 산 황매산이 모산이다.

5월 황매산 정상아래 철쭉능선에 서 보라 분홍빛 바다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사람들은 이내 분홍물이

전신에 들여져 철쭉도 사람도 온통 분홍빛이 된다.

황매산은 복 받은 산이다.

신이 빚은 순결바위 능선의 빼어난 절경과 바람 조금만 불어도 금방이라도 대양을 향해 갈 태세로

돛대 더 높이 세운 황포돛대 바위 능선 그리고 수석 전시장을 방불케 하는 감암산을 아들로 두었으니

떡갈재 푸른능선이 더욱 빛날수 밖에... 

 

 

 

 

영암사지터를 지나 순결바위 능선아래 계곡을 따라 오르는 등산로는 인적이 뜸하다.

새로 황포돛대 바위 능선을 오르는 코스는 사람들로 붐벼 은은한 솔향을 맡고 기암들을 감상하며 여유

롭게 오를수 있다. 발아래 물 가득담은 대기리 저수지도 완연한 봄빛이다.

모산재를 오른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작지만 모든산을 다 갖춘 소금강을 닮은 봉우리라고.....

 

 

황포돛대 바위

 

 

 

황포돛대 바위능선

 

 

 

병풍같은 순결바위 능선

 

 

 

돼지코 바위

 

 

 

 

또한 모산재 산행의 대미는 소중한 우리 문화재를 공부할수 있는 장소다.

바로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영암사지터가 그곳으로 먼저 보물제 489호인 귀부를 만난다.

금당터의 동서에 위치한 2기의 비석은 비(碑)와 머리장식이 없어졌다. 동쪽 거북모양의 비석받침(귀부)

는 용머리에 목을 곧바로 세운 힘찬모습이다. 겹줄로 귀갑문이 새겨진 등은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서쪽 거북모양의 비석받침(귀부)는 크기도 작고 움츠린 목에 등도 편편하다.

고려시대에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보물제 353호인 석등이다.

1933년 일본인들이 밀반출 하던것을 가회면사무소에 보관해 오다가 1959년 절 터에 옮겨 세웠다.

불법의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위는 지붕돌을 덮고 아래는 3단구성의 받침을 두었다.

4개의 창이난 4면에는 두터운 돋을 새김의 사천왕상이 있고 1단은 아래로 향한 연꽃잎 2단은 쌍사자가

꼬리를 치켜세워 위를 떠 받치고 있으며 3단은 위로 향한 연꽃잎이 조각 되었다.

9세기경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속리산 법주사의 쌍사자 석등(국보제5호)와 더불어 우리나라

석등을 대표하는 걸작이다.  마지막으로 보물제 480호로 지정된 영암사지 삼층석탑은 높은 2중기단에

몸돌은 1층에 비해 2층과 3층이 아주 낮은편이다. 지붕돌은 얇고 평평하며 아래 부분에는 4단의 주름이

잡혀져 있다. 탑의 규모가 비교적 작고 지붕동 아래부분의 주름이 4단으로 되어있어 5단으로 되어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탑보다는 늦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약 9세기 후반에 세워진 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