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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남정맥 길

낙남정맥 종주 제12구간(화원-가화강-2번국도

낙동정맥 종주 제12구간

화원마을-102봉-130봉-실봉산-모산고개-170봉-버드골재-유수재
150봉-가화강-2번국도-190봉-연평도로-2번국도(내동재)

2004. 7. 11. 장마. 구름 두터워졌다가 흐리고 그리고 소나기


지루한 장마가 계속된다. 부대장(독도.기록)이 지리산속으로 들어가 오늘은 대원 모두가 두눈 부릅뜨고 산길을 찾아야한다. (부대장은 이번 토요일 이 구간을 단독 종주 예정이지만 졸자가 동행해야 하지 않을까?) 08:07. 굴다리가 있는 화원마을 입구에 도착하여 모두들 장비를 챙긴후 굴다리를 지나가니 맞은편 별장인듯한  철제 대문위로 늘어진 소나무 가지와 능소화가 예쁘게 피워 보기 아름답다. 좌측 소류지엔 이른 아침임에도 태공이 없다. 여기도 정간의 줄기는 고속도와 지방도 주택지등으로 형편없이 깔아 뭉개져 마루금이 사라진지 오래다.  시멘트 과수원길 접어 들기전 지난 11구간 종주후 뒤풀이한 가든의 부부가 텃밭에 김을메고 있다.  후덥지근한 날씨라 74봉을 오르는데도 땀이 비오듯 쏟아진다. 

능선 작은 과수원엔 감과 배가 가을을 향해간다.  

 

 

화원마을 굴다리

 

오늘은 도로를 5번이나 만나게되는 재미없는 구간이라고 어느 선답자의 종주기를 생각하며 102봉을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주변 신록과 잘 정돈된 푸른 과수원이 보기가 좋다.  선답자는 겨울에 이곳을 지나가 아마 황량감에서 그런 얘기를 한것같다. 102봉 봉우리엔 늙은 밤나무단지가 세월의 무상함을 말하는듯 측은하게 서있다.  70년대 한창 밤나무재배를 장려하던 그 어렵던 시기에 식재되어 식솔 두엇은 고등학교 까지 보내었을까?  사람이나 나무나 늙어면 관심밖으로 밀려나기 마련인가보다. 이곳 주인 발길 끊어진지  오래된것 같다. 정삼품 벼슬을 지낸 통정대부 전한광의 묘를 지나 조금 내려가니 임도가 있는 삼거리를 만나 직진한다. (09:15) 여기서 대원들은 모두가 놀란다. 봄철 우리네 식탁 최고의 산채로 꼽히는 두릅이 수만평 식재되어 있다.(이걸 야생???)  정간길 우측으로 빽빽히 들어선 두릅 진주시내는 물론 경남 사람들 전체가 먹어도 족할것같은 이 군락을 보며 우리가 말하는 야생 두릅도 내가 직접 채취하지 않고는 모두가 복합비료에 키워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무튼 장관이고 다른 과수에 비해 농약 살포없이 소득을 올릴수 있다는점이 농가에 큰 보탬이 될것같다. 

아니 이곳은 기업이라고 표현함이 적절치 않을까 

 

 

시루산 시멘트 임도 우측으로 두릅단지가 시작된다.


산불초소가 있는 봉우리 우측에도 두릅 재배지는 계속이어진다. 09:30분 실봉산 정상에 도착하니 작은 삼각점이 뚜렷하고  삼각점  옆 묘2기가 장마비로 잡풀이 무성하다.   모산고개에 내려서기전 간간히 참호가 보이고 전화선인 pp선이 지휘호로 연결되어있다. 2000년에 개설한 진주시 와 산림조합의 임도가 개설된 모산재( 09:50)에 도착하여 수박화채와 막걸리 한사발씩을 서로 나눈후 170봉을 향해 일어섰다.   길은 뚜렷하고 작은 능선이라 후덥지근한 장마철 오늘같은날 산행하기에 더없이 좋은 구간이라며 대원들은 신바람나게 간다. 허긴 오늘 구간은 고도가 200이 넘는 봉우리가 없다.  버들재에 가까워져 오자 중장비 소리가 시끄럽다  여기도 도로 확포장 공사로 산줄기는 절개되어 김해쪽에서 지리산쪽으로 올라가는 정간꾼들은 특별한 주의가 요망되는 지점이다.  즉 직진하기가 쉽다. 어제 호남에서 온 정간꾼들도 우리들 처럼 직진해 가다가 다시 되돌아 왔단다. 

 

 

기차길 터널위에서 한참 길 헤며다가 유동에서 내동까지 도로공사 현장이 맥임을 확인했다.

 

한참을 헤며고 있는데 기차가 지나간다. 유수터널이 발아래에 있다고 가정해도 개념도로는 찾아 가기가 어려워 멀리 과수원에 일하는 사람들에게 등산객들이 그쪽으로  다니더냐고 묻자 반대 방향으로 가란다. 그래도 긴가민가하여 공사중인 도로를 내려가면서 인부에게 묻자 이 길 따라가면 된단다.  어제도 정간꾼들이 이곳에서 헤며다가 자기들이 가르켜 주었단다.  지리산 쪽에서 김해로 가는 사람들은 헷갈리지않고 찾아갈수 있다.   유동에서 내동으로 연결되는 도로공사 구간을 지나 넉넉한 과수원을 좌우로 보며 초원지대에 앉아 휴식하며 헤면 버들재를 올려다보니 흐린날씨라 희미하다.

 

 

헤면구간. 좌측능선이 맥이 아니라 도로를 따라와야 한다.

 

 

다시 감나무 과수원을 지나고 봉우리 하나를 넘어 작은 소나무 재배지를 내려서니 유수재다(11:24) 유수재는 진주시 내동면과 사천시 축동면의 경계다.  약간의 초원지대를 지나고 밤나무단지를 지나자  산딸기 가시나무와 칡넝쿨이 발목을 잡고 종아리를 사정없이 활퀸다.  과수원 봉우리에서 점심을 먹을려고 하였으나 눈앞에 150봉이 날 넘고 식사를 하라고해 물한모금으로 목젖을 적신후 일어선다.  묘지옆에 터를 잡고 가랑비가  굵어지기전 재빠르게 점심식사를 했다. 35분정도 걸렸나  빈 그릇과 짐을 꾸리고 조금 내려가니 은빛 스피커가 4개나 장착된 유수 낙동강 홍수경보시설을 만나 사진 한장을 찍은후 좌측으로 돌아 과수원과 원두막 비슷한 농막시설 옆을 돌아나가니 통한의 가화강을 건너는 유수교다.

 

 

 

유수교를 건너는 종주대


진양호댐이 생기면서 홍수조절용으로 생긴 강이다. 진양호 만수시 사천만으로 방류하는 인공으로 축조된 이 강은  해마다 홍수때만 되면 사천만 근해에서 생계를 이어가는 어민들이 울부짖는
눈물강으로 변한다. 그리고 낙남정간(정맥)을 탄 사람들은 이 인공의 강줄기를 조금만 한쪽으로 옮겨 놓았다면  강제로 맥이 끊어진 불행한 현실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통탄해 한다. 허긴 맥줄기가 얼마나 중요한것인가를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이  계획한 일이라 조기착공만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脈이 얼마만큼 중요하다는것은 일제 강점기 조선의 기상을 꺾기위해 대간을 산맥으로 격하시킨것은 차치하고서라도 팔도강산 地血이라고 느껴지는곳은 어김없이 쇠말뚝을 박는것만 보아도 그 중요성이 입증되는것이다.  그래서 요즘 난개발로 대간의 맥. 정간(정맥)의 맥이 사정없이 잘려 그 氣가  쇠퇴해져 국운이 약해짐을 한탄하는 목소리가 드세다.  비통한 심정으로 유수교를 건너면서  맥 양쪽으로 갈라놓은 가화강을 내려다보니 왜가린지 백노인지 떼지어 두발을 담그고  물고기 사냥에 여념이 없다.  

다리끝 좌측으로 돌아  우측 넓은 멍석같은 암반에 앉아 건너편 끊어진 산줄기를 쳐다보며 대원들 모두가 아쉬워한다.

 

 

가화강

 

타작마당만한 암반에서 일어나 올라서니 개망초가 반기고 단풍나무 몇그루도 눈에뛴다. 이제 식재한 참깨밭을 가로질러 산길로 접어들어 마지막 나지막한 봉우리에 내려서니 어제 하신지점 확인차 몇번을 오고간 2번 국도상 고개마루의 공사현장이다. 여기도 맥을잇는 마루금은 없다. 차량질주로 건너편을 향해 냅다 달려 입구에 매달아논 자연산악회 리본을 확인한후 190봉을 향해간다.  190봉엔 삼각점이 있다.  1998.재설. 

 

 

190봉을 지나면 다음 봉우리를 주의해야 한다. 이 구간 마지막 안부 사거리에서 올라서니 진양정씨 가족묘(15:07)를 만났다. 안부에서 잘못하여 우측으로 가면 진양호로 가게된다. 좌측으로 꺾어 내려가니 수몰된 연평마을의 유래비가 있는곳에 도착했다.  진양호로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 많다.  구구절절 시처럼 적혀진 유래비 사람들은 고향에서 이곳에 적힌 詩처럼 살고 싶었을것이다.  건설회사 표지판이 있는 2층 민가앞 봉우리를 힘겹게 올라서서 좌측 제법 큰 가족 납골묘를 만나고  작은 시멘트 포장도로에 내려서니 우측이 신흥목장 인가보다.  수마리의 개짖는 소리가 골을 흔든다.  신흥목장으로 내려가는데  덩치 큰 주인 아줌마가 팔을 내저어며 오지말란다. 건너편 봉우리로 올라야할걸 잘못간것이다. 작은 봉우리를 올라 내려서니 500여미터 전방에 여대장 차가 보이는 솔티재(내동재)다. (15:40)  좌측 블럭공장 의 지게차 소리가 12구간 마침을 알려준다. 후덥지근한 날씨 땀 비오듯 쏟아내며 종주한 대원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감동이 있는 낙남정간 제13구간 (솔티재 160봉 나동공원묘원 선들재 오랑동 원전고개)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진양호로 수몰된 고향마을을 기리기 위한 연평마을 유래비. 구절마다 고향의 내음이 묻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