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8. 19.
손을들어 별을따면 금방 베낭에 가득담길 테를지의 밤이 그리운 울란바토르 호텔방.
밤새도록 창틀까지 떨리는 코골이에 필자는 테를지의 초록바다에 날이 샐때까지 자멱질을 했다.
새벽녁 창문을 두드리던 빗방울은 비 기다리는 몽골인의 간절한 소원에도 불구하고 누더기처럼 덕지덕지 붙여놓은 아스팔트만
살짝 적시고 지나간다. 3층 호텔 베란다에서 내려다본 새벽 거리풍광은 낚은 자동차의 행렬이 계속 이어지고 연인들의 다정한
모습에서 이국이라는 색깔은 전혀 느낄수가 없다.
방으로 배달온 빵 부스러기와 야채를 꾸역꾸역 입안에 밀어넣고 만찌르 사원을 둘러보기 위해 다시 버스에 올랐다.
늘 시간에 쫓겨 짐짝처럼 신 새벽부터 이동하는 차에 시달리는게 보통인데 이번 체험은 여유롭다 못해 심심할 정도로 시간들이
여여롭다. 만찌르사원 입구에서 나눠먹을 과일과 음료등을 수퍼에서 구입하고 있을 무렵 러시아에서 중국 지닝을 향해가는 화물
열차인지 목재를 실은 열차의 적재함이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일주일을 달린다고 했던가?
영락없는 알프스다.
쾌적한 휴양지인 이곳은 이 나라 정치인들과 부유층의 사람들이 하계 휴양을 올 정도로 경관이 수려하고 파란하늘의 나라에
걸맞게 티없이 맑은 푸른하늘에 뭉개구름이 있어 하늘임을 알수있다.
간밤 비가 온 탓인지 날씨가 너무 쌀쌀해 반바지를 입고 나온 필자는 춥다.
극성스러운 마나님들 남편들 챙기기가 도를 넘어 가득이나 추워 덜덜 떨고있는 필자를 더 춥게한다.
푸른 숲 위로 아득한 날들이 자꾸 떠올라 얼른 야생화 핀 풀밭으로 내달려 카메라 셔트만 눌러댄다.
자유.평화.그리고 넉넉함.몽골의 초원은 자유 그 자체다.
만찌르 사원에서 내려다 본 입구 풍광.
앙코르와 태국의 아유타야의 페허된 사원이 만찌르에도 있었다.
과거 라마교가 융성했던 그 시절에는 드넓은 이곳들이 모두 사원으로 꽉 채워져 있었다니 종교 억압의 실태가 어떠 했는가를
과히 짐작 할만하다. 티벳 라마교를 도입한 탓인지 이곳의 어워와 비석들은 온통 천이 감싸고 있다.
서양인들도 동양의 문화가 신기한지 어느 한곳도 놓치지 않을려는듯 카메라를 들이대며 원드풀을 외치는게 꼭 천진난만한 아이들
과 같다. 어제 아침 식당 입구에서 셀수없이 진하게 입술을 부비는 그들 문화에 내 얼굴이 화끈거려 바로 쳐다볼수 없는것 처럼
그들 역시 낮선 문화에 익숙할수는 없을것이다. 지천에 핀 야생화. 푸른숲과 파란하늘 뭉개구름 그리고 평원.
만찌르 사원에서 내려다 본 풍광은 어릴적 갖고 싶었던 알프스의 그림엽서 바로 그것 이었습니다.
앙코르. 태국의 아유타와에서 본 폐허된 사원이 이곳에도 있다.
▲ 만찌르 사원
만찌르 사원에서 주차장으로 내려오니 주차장엔 역시 우리 중고차들이 계속 들어온다.
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추운지 몸을떨고 서 있는게 우리나라 11월 초겨울의 풍경이다.
이 아름다운 휴양지에 변변한 화장실이 하나없고 벌판에 서 있는 재래식 화장실은 문짝마져 떨어져 나가 씁쓸하다.
이곳엔 대륙의 패권자 중원을 질주하던 몽골인의 기상은 어느 한곳도 보이지 않는다.
출발할때 수퍼에서 사가지고 간 수박을 나눠먹고 종교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라마교의 대사원"간등사"를
가기위해 버스에 올랐다. 아침에 이곳 만찌르사원을 오기전 고속도옆 초원엔 몽골 전통복을 입은 사람들과 말을 탄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여 있어 의이해 하고 있었는데 돌아올때는 반대편 초원에 수많은 차량들과 사람들이 보여 무엇을 하는거냐고 물었으나
수도 울란바토르 시내서 살아온 "간바와 소라"는 무슨 행사 같다고 말해 그곳을 가보자고 제안을 했더니 일행들의 눈치가 별
달갑지 않다. 그러나 그기에 주눅들 필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혼자고 새로운걸 보고 가야하는 강한 충동이 솟구쳐 올라 더는
참을수가 없기 때문이다. 필자의 제의에 트레킹을 좋아하는 요양원 원장이 거든다.
새로운걸 보고 가야 한다고...
영원한 "칸의 후예들"
징키스칸.(1162-1227)을 다시 만나다.
800년전의 칸이 화려하게 부활하여 몽골의 초원에서 필자와 만날수 있었다.
그가 나약한 백성들을 향해 부르짖던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가 수만마리의 발발굽보다
더 큰소리가 되어 나의 귓전에 들려온다.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동네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주눅들지 말라.
나는 들짐승을 잡아 먹으며 목숨을 연명했고,
생명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내가 갈 길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원망하지 마라.
그림자 말고는 나는 친구도 없고 병사로도 10만.
백성은 어린애, 노인까지 합쳐 고작 2백만도 되지 않았다.(현재도 국민총인구 280여만명)
배운게 없다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도 몰랐으나 대신 남이 말하는것을 소중히 귀담아 듣고
스스로 현명해지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을 했고,
얼굴에 화살을 맞고 생사의 기로에 서기도 했다.
적은 항상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은 깡그리 없애버렸다.
나를 극복하는 그순간에 나는 징기스칸이 되었다.
영영 볼수도 만날수도 없을 이들의 문화를 만날수 있었다.
푸른 초원위에 인의 장막이 된 관중석.
그 한가운데 웃통을 벗은 건장한 청년들의 힘 겨루기(씨름) 전통 복장을 한 근엄한 촌장들과 행사 요원들의 여유로운 행동이
"빨리빨리"의 우리에겐 퍽 인상적 으로 다가온다.
이런 여유가 광활한 대륙을 차지하고 서구를 향해 말을 내몰아 달려간 것이리라.
징키스칸의 후예들이 고장의 명예를 건 한판 진검 승부를 펼치는 축제의 장을 오늘 만난것이다.
모래바닥이 아닌 짧은 풀밭에서 서로 당기고 넘어지며 맨몸을 과감히 던지는 용감함에 "칸"의 피가 흐른다.
칸의 후예들 속으로 직접 들어와 그들의 진정한 문화를 직접 만나기랑 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고 보면 오늘 이들과의 만남은 어쩌면 필자의 생애에 가장 의미있는 시간들로 추억되지 않을까?
낮선 이국인의 사진 촬영에 흔쾌히 미소를 지으며 포즈를 잡아주는 연로한 본부석 촌장님들의 친절에 어느새 필자는 고향 면민
체육대회장을 온듯 이곳 저곳을 누비기 시작했다.
대회 본부석. 우리 행사 문화와 흡사하다.
마유주.
관중석 옆 각 마을 본부석격인 게르에는 이쁘고 마음씨 고운 몽골 아낙이 필자를 잡고 마유주를 마셔보라며 큰 사발에 가득 담아
권하지만 독주로 타버린 속이 강하게 거부한다. 허지만 계속해서 입앞까지 "마유주"를 들이대는 통에 할수없이 한컵을 마셔 보니
마유(馬乳)여서 그런지 약간 요구르트 맛도 있다. 안주는 말 수육. 처음 먹어보는거라 그런지 아니면 양고기보다 냄새도 없고
기름기도 없어 담백하고 아주 부드러운 맛이다. 필자의 입가에 묻은 술을 손으로 훔쳐 옷에 닦으라는 몽골여인의 손짓에 입술을
손으로 훔쳐 양말에 닦자 구경하던 "몽골"여인들이 파안대소로 필자를 신기한듯 쳐다봐 나도 크게 한바탕 웃었다.
아!이들과 어느새 나는 하나가 되어 있다.
전혀 낮설지 않는 고향 이웃의 아낙들 바로 그런 분위기다.
경계심 이라고는 어느 한곳도 없이 그저 늘 만나는 사람으로 정이 넘쳐 나온다.
역시 피부와 얼굴 생김이 닮았다는것 그것은 정말 기분좋게 빨리 친해질수 있다는걸 느꼈다.
▲ 이 날의 하일라이트 만5세에서 10세까지 장장 3시간여를 달려온 기마경주
골인점을 향해 말등에서 일어선 아이들이 말채찍을 힘차게 치며 독려를 한다.
▲ 마상의 여인은 미소까지 지어며 필자의 사진 찍기를 도와준다.
와!와 !
갑자기 군중들이 초원 저편으로 달린다.
엉겁결에 필자도 카메라를 들고 그들을 따라 달려갔다.
지축을 울릴만한 수백.수천필의 말이 광활한 초원위를 달려오고 있었다.
경찰차와 의료진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아침 반대편 초원에서 출발한 "칸"의 후예들이 3시간여의 평원을 말로 달려 골인하고
있는 장면이다. 이 광경을 과연 어디에서 볼수 있을까?
그것도 만5세에서 10세까지의 아이들만 벌이는 목숨건 승마경주를...
이들은 푸른 초원에서 이렇게 일찌기 호연지기를 기르고 강인한 정신을 함양하고 "칸"의 카리스마를 배우며 척박한 대륙에서
살아 남는법을 터득해 가는가 보다. 해마다 말에서 떨어져 한 두명이 목숨을 잃어가도 징키스칸의 후예임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걸르지 않고 대회를 개최한다는 그들의 설명에 인구는 작아도 거대한 땅덩어리를 보존하는 큰 이유를 알것 같아 세삼 접경
의 중국을 미워하며 다시한번 강한 나라로 우뚝서길 빌어본다.
▲ 이번 대회서 마지막 까지 애마의 엉덩이를 째찍질 하며 골인하던 이 소년은 아깝게 3위를 한후 안타 까움에 울음을 터트린다.
말은 통하지 않겠지만 사탕을 쥐어주며 내년에는 꼭 1등을 하라고 등을 두들기자 좀 진정이 된듯 총총히 시상대로 가는 모습이 안스러워 보인다.
아이야 ! 기회는 또 온다. 말 채찍에 더 힘을 줘라. 내년엔 넌 꼭 "칸"이 될거야.
생각 같아서는 폐회때 까지 여기에 남아 이들과 어울리고 싶은 심정이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치가 보여 아쉽지만 일어섰다.
떠나는 우리를 쳐다보며 밝은 미소로 손을 흔드는 몽골 아낙네들의 표정에서 예전 도회로 유학을 떠날때 정류장에서 손을 흔들던
식구들의 모습이 초원의 뭉개구름 처럼 핀다. 다시 고속도를 진입해 말.양.야크들의 호위를 받으며 토라강 다리를 건널때 얼굴에
화장기 하나없이 진종일 소떼를 보는 여인의 얼굴이 너무 안스럽다. 강 어귀 강버들이 고향강의 모습 그대로다.
몽골 독립의 진원지 수흐바토르 광장에 서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 도착해 수흐바토르 광장을 찾아갔다.
몽골혁명의 아버지라 불리는 수흐바토르의 동상이 광장을 압도한다.
1921년 몽골 인민정부를 수립한 것을 기념해 만든 공원으로 주변엔 신축공사가 한창인 정부청사와 국회의사당 오페라하우스
문화예술회관등 몽골의 정치.경제.문화가 이곳을 중심으로 모여있다.
하늘과 가까운 땅 몽골.
바람의 나라.
징키츠칸의 나라.
파란 하늘의 나라.
혹자들은 제국의 태양은 졌다고 말 하지만 필자가 만난 몽골인은 몽골리안은 아직도 가슴에 부글부글 타오르는 붉은 태양을
가지고 있었다. 올해로 몽골은 건국 800주년을 맞았다.
따라서 그들의 가슴엔 800여년전 광활한 대륙을 호령하며 서구사회를 향해 과감히 돌진하던 위대한 불세출의 영웅 징키츠칸을
화려하게 부활 시켜 전 국민의 가슴속에 활활 타오르게 하고있다.
오페라 하우스
▲ 신축하는 정부청사.
▲ 국립 역사 박물관.
우리나라의 7.5배가 넘는 국토에, 1㎢당 평균 1.3명이라는 적은 인구가 트레킹 내내 마음에
걸린다. 이를 빌미로 내몽골을 자치구로 통솔하는 중국이 엄청난 땅덩어리를 보유하고도 호시탐탐
몽골을 자신들의 자치구에 복속 시키려고 접경지역 청년들을 몽골로 보내 몽골 여인과 혼례를 시켜
중국인으로 만들어가는 행위 자체에 심한 분노를 느낀다는 "현지인 깐바와 소라"의 말에 필자도 내심
부아가 난다. 태초의 드넓은 초원과 그 위를 줄기차게 달리는 징키츠칸의 후예들 그들이 세계에서
전무후무한 땅을 보유한 자손이라는 긍지를 펼칠 그 날을 기대하면서 17세기에 지어져 1930년까지
계속된 종교탄압에도 굳건히 지켜 보존한 간단사원으로 이동해 간다.
둥그런 동판안에 불경이 들어 있단다. 이는 글을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을 위해 글을 읽지 않고도 동판
만 돌리면 불경을 다 외운 효과가 있어 문맹의 사람들을 위한 라마교의 배려인지 아니면 당시 몽골엔
문맹인이 많아서인지 아무튼 그 발상 자체가 부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한점이 대단하다.
고색이다. 허긴 17세기에 지어져 1730년 공산화 이후 줄기차게 진행된 종교 말살정책에도 굳건히
보전이 되었으니 죽음으로 항거한 이들의 노력이 지붕위 잡초처럼 강인하지 않았을까?
(종교 말살정책때 5000여명의 승려가 죽음을 면치 못했단다.)
울란바타르엔 라마승려가 약400명 정도인데 이중 300여명이 이곳 간단사원에 있다니 그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이곳에는 우리나라처럼 불교대학이 속해 있어 라마승을 배출하고 있 다.
위 사진 좌측 사원안에 27미터의 금불입상이 있다.
현재의 것은 모조품이고 진품은 러시아가 가지고 갔단다. 국력이 얼마나 중 한가를 여기서도 느낀다.
라마불교의 진수를 보았다.
그리고 알았다.근본 자체를 없앤다는것 .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짓이고 불가능 하다는걸 여기 간단사원에서 체험해 간다.
영토 넓히기에만 급급한 징키츠칸은 중국의 진 시황처럼 개인 숭배를 위한 유물하나 만들지 않았으니
개인의 우상화 보다는 제국을 생각하는 마음이 충만해 있지 않았을까?
변변한 왕궁하나 없는 이 넓은땅에 간단사원이 너무 크게 보이는건 필자뿐일까?
돌아나오는길 무릅에 연인을 앉혀놓고 진한 사랑을 나누는 몽골 젊은이를 보고 "소라"에게 "참 보기
좋다"를 몽골어로 물어 그들에게 말했더니 두사람 필자를 보고 크게 웃는다.
(행복하세요.그리고 쉽게 찢어지지 마세요...혼나요 아셨죠.ㅎㅎㅎㅎㅎㅎㅎㅎ)
마지막 일정은 국립 민속예술단의 공연이다.
공연장 규모는 적지만 1시간 20여분의 민속 공연은 몽골인의 생활과 풍습 문화를 조금이나마 이해
하게 되었지만 공연 내용을 촬영하면 돈을 내야 한다는 말에 실망이다.
허긴 사원의 불상을 찍는데도 돈을 내야 했으니... 더욱 아쉬운것은 공연 장면을 소개하는 장내 아나
운서가 몽골말을 영어나 일어 그리고 우리말로 번역해 관중들의 궁금증을 풀어줘야 함에도 몽골어만
사용해 좋은 공연을 내용도 모른체 그들의 행동에만 박수를 보냈다.
한뼘 남짓한 개미허리에 비파인지를 뜯는 소녀의 손놀림이 진하게 진하게 전해오네...
2006. 8. 20. 새벽6시 "간바"는 집안에 초상이 나 작별을 같이 할수없어 서운하다.
어제 5불을 주면서 아들 과자 사주라고 했더니 너무 고마워해 오히려 필자가 더 미안했다.
필자의 직업을 물어 말해 주었더니 이곳에서도 그 직업은 대단히 존경받는 직업이라고 해 지금 한국
은 법률업이 엄청난 사양길을 걷는다고 했더니 믿지 못하겠다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허긴 70-9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 역시 정말 괜찮은 직업군 이었다.
징키츠칸 국제공항 작은 국제선 청사는 보내는 사람들과 떠나는 사람들이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이별을 나눈다. 아메리카에서 온듯한 소녀는 원주민과 그새 깊은 정이 들었는지 눈가에 이슬이 맺혀
있고 어떤이는 원주민에게 자신의 입술을 손에묻혀 보낸다.
"소라도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어 필자도 눈시울이 뜨거워져 와 얼른 들어가라고 손짓을 보냈더니
버스를 향해 사라졌다. 올적에는 시간을 당겨 이륙하더니 갈적에는 20여분이 느리다.
굉음이 들리고 도움닫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머리를 치켜 세우더니 토라강도 푸른 초원
그리고 파란산 울란바타르가 시야에서 멀어진다. 이내 비행기는 18,000미터 상공을 유영하고 몽골
국토의 3분지2를 차지한다는 고비사막 위를 지날때 황량한 저 거대한 땅덩어리가 우리꺼라면 분명
여기에 또 하나의 기적을 우리는 이루어 낼수 있을텐데... 하는 여운이 남는다.
며칠간의 일정으로 필자가 몽골을 얼마나 알겠는가?
다만 바람의 나라. 푸른 하늘의 나라. 세계에서 가장 고원에 있는 나라. 그리고 전무후무한 영토를
확장했던 불세출의 영웅 징키츠칸의 제국만 알고 간들 누가 탓하랴.
허지만 피부색이 얼굴 생김이 비슷한 풍습이 더욱 그들과 가까워질수 있었고 걸음마만 하면 "칸"들
의 후예답게 말을타는 이들의 용감성이 필자를 흥분되게 하였다.
다시 가보리라.
이제 가면 거친 알타이 산맥을 오르고 사흘밤 낮을 낙타를 타고 고비사막을 가보리라.꼭
긴 시간 졸필과 졸작에 함께 해주신 여러님들께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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