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무는 시샘이라도 하듯 넉넉한 어머니 젖가슴 같은 섬진강을 휘감아 강 전부를 보여 주지 않는다.
하동포구는 물론 평사리앞 옛 나루터도 회색빛 의식에 모든것을 막아놓고 말았다.
시퍼런 물빛과 은빛 백사장 그리고 작은 바람에도 서럽게 우는 갈대소리가 눈과 귀를 멀게하는
섬진강이 하룻밤사이 칠흑 같은 연무가 덮고 있었다. (2009. 11. 28.)
성제봉(형제봉, 1115m)산행의 백미는 바로 젖줄 섬진강 조망이다.
물론 풍요로운땅 악양벌의 넉넉함도 그리고 장쾌한 지리산릉의 조망 역시 성제봉 산행의 대미를
장식하지만 눈을 감으면 가슴속으로 흐르는 섬진강의 유장함이 필자에겐 뭐라해도 압권이다.
성제봉 아래 펼쳐진 악양벌 입구 봉대리는 한국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박경리 선생의 불후의 대작
"토지"의 무대가 된 곳 으로 사시사철 글객들이 그리고 그를 그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최참판댁"
으로 몰려들고 있다. 필자의 생각으론 거지들이 1년 365일을 얻어 먹고도 더 얻어 먹을집이 있었다는
풍요로운 이곳에 "최참판"이라는 만석꾼을 설정하지 않았을까?
선생은 처음 토지를 쓸때 "악양벌과 평사리를 한번도 가본적이 없었으나 출간후 평사리가 자신이
소설속에서 그렸던곳과 너무도 흡사했다고 하니 선생의 예지력에 혀를 내두를수밖에...
한산사. 이 절의 저녁 종소리가 악양8경중 하나
오늘로 성제봉 산행이 5번째다.
산악회 책임자로 있을때 답사와 정기산행, 그 후 단독산행 2번 그리고 오늘까지
악양면소재지를 지나 초행길인 정서마을 위 청학사 방면의 길로 접어들다가 물을 준비하지 못해
다시 면소재지로 돌아가 마트에서 물 한병을 사서 최참판댁 옆 상평 한산사로 갔다.
처음 성제봉을 답사 왔을때를 추억할겸 한산사 대웅전앞을 지나 밤나무단지 임도에 들어서자
길위에 드러누운 낙엽들이 을씨년스럽다. 한산사의 저녁종소리가 악양팔경(소상8경)의 하나였지만
어느해인가 산사태로 범종루가 사라진건지 황망한 터만 남아 허하다.
외둔에서 올라오는길과 접하는 능선에 올라서면 새로 단장한 이정표를 만난다.
그리고 산길 접어든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소산성을 만나게 된다.
필자가 처음 왔을때는 산성 안내문에 신라때 소정방이 축조(사적151호)했다고 적혀 있었던것 같은데
오늘 살펴보니 그런 내용이 없다. "하동군지"에도 신라의 김춘추가 벽제공격을 위해 당의 원병을
청해 축조했다는 기록이 있다는 글을 본적이 있었지만 군(郡)지의 글도 사실과는 동떨어진 내용이다.
아무튼 현재 세워진 안내문을 보고 성루에 올라 악양벌과 섬진강을 조망해 보지만 더 심해진 연무로
강도 벌도 조망은 어렵다. 성루 끄트머리 지점에서 주차장에서 올라오는 산길과 만나 통천문을 향해 간다.
발아래 흐릿하지만 섬진강물이 백사장을 적시며 흘러간다.
막힐것 없는듯 하지만 물굽이를 만들며 강이 흐르듯 한장 남은 달력에 또 한해가 위태하게 걸려있다.
강물은 안개같은 연무를 두려움 없이 밀쳐내며 바람과 함께 쉴새없이 아래로 내려가면 승냥이떼 처럼
서서 겨울노래를 부르는 갈대들의 발목에 아린 물살이 적실것이다.
성제봉의 오름은 조망이 없는날엔 지루하다.
정상까지 6.4km의 거리를 우습게 보아서는 안된다. 능선의 계속되는 오름길이 버겁기 때문이다.
상평.하덕.입석 정동.정암.중기.평촌등 악양벌이 삶의 터인 마을 전부가 연무가 안개처럼 덟어 갑갑하다.
봉수대와 신선대에 팻말이라도 하나 세워져 있으면 좋으련만...
대한민국의 영산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는 통천문보다 더 비좁은 성제봉 통천문은 높이 10여미터의 바위
2개가 맞대어 그 곳을 통과할려면 거구의 사람들은 좌측 우회길을 가야한다.
처음 이곳을 지날때 필자도 가뿐히 간것 같은데 오늘은 조금 비좁은걸 보니 그 사이 살이 좀 붙은건지...
하늘로 향하는 문이 쉬이 지나갈수 없음은 단절된 세상이- 삶이 얼마나 답답하고 허망한건지를
일깨워 주는것 같아 엉거주춤한 내 자신을 한번더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연무에 마을 조망도 어렵고
여기가 성제봉 통천문
바위에 억겹의 솔잎(갈비)이 덢어 이 겨울이 포근할거다.
그리고 바위속에 인고의 세월이 뿌리내린 솔 한그루
필자가 걸어온 봉우리들 연무로 흐릿해 더욱 멀어 보인다.
신선봉 뒤로 철쭉화원 과 그 너머 정상
신선대는 제법 웅장하다.
아찔한 구름다리는 멀리서 보면 아주 절묘한 아름다움도 주었다.
이곳에서의 섬진강 조망과 섬진강을 병풍처럼 싼 거무스름한 산세들의 웅장함이 범상치 않음은
유장하게 흐르는 젖줄 섬진강이 발목들을 담궈서가 아닐까?
구름다리에 서자 쏴-아 바람이 땀이밴 등줄기를 시원하게 해준다.
철계단을 내려서 다음 봉우리에 올라 반대편을 응시하자 내려온 철계단과 구름다리의 자태가
연무에 묻혀 너무 아쉽다. 덤으로 볼수 있었던 풍광들이 오늘은 볼수없어 안타깝다.
작은 다리를 건너면 우측 헬기장이 나온다.
면소재지에서 올라오는 산길이 여기서 만나고 우측엔 입석의 바위군락이 직립으로 도열해 있다.
안온한 분위기를 연출해내는 철축화원이 있는 성제봉도 5월 철쭉산행지로도 손색이 없다.
정상에서의 지리산 조망도 억새에 스미는 섬진강의 풍광도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해야 한다.
오름내내 혼자여서 오늘 이 산에 필자 혼자 산길을 재촉한줄 알았더니 정상 부근에 도착하자
산길 함께한 부부와 중년의 산객둘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그들 뒤를 따라 필자도 하산을 서두른다.
섬진강에 빠르게 어둠이 내린다.
희뿌연 연무를 뚫고 갈래져 내리 비추던 해도 산이 삼키고 갈대꽃 사이로 자리잡은 산과 강
그리고 사람들이 제집을 찾아 착륙한 오리떼 처럼 이제 천천히 일상의 고단을 휴식할 채비에 있다.
물살마져 누운듯 고요해 어둠이 내리는 섬진강은 침묵으로 흘러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