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사 / p r a h a
갑사에서 보낸 하루
김경성
일주문을 들어서면서 몇 번이고 뒤돌아봐야했네
나무의 몸이 구부러진만큼
그림자 둥그렇게 길을 건너서 다른 나무 위에 포개졌네
겨울 나무, 제 몸의 경전 하늘 복판에 펴놓고
바람의 말을 적고 있는 동안
새들이 앉아서 읽고 있었네, 먼저 읽은 새들은
날갯짓으로 길을 지우며 다른 나무의 경전 속으로 날아갔네
어떤 나무는 이슬발자국인, 서리꽃 밟으며
머리 감고 있는 연잎 밑으로 밀어넣기도 했다네
오래 오래 퇴적된 시간, 옹이진 나무 속으로 들어가
제 속을 비우며 바람 안고 있었네
시간이 흘러갈 수록
나이테의 낱장 점점 단단한 지층이 되고
어떤 나무는 경전을 완성하기도 전에
톱날에 이끌려 펼쳐지기도 했다네
대팻날을 통과하여 거품처럼 부풀어 있는 소나무의 톱밥
부도비 앞에 쌓여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묵언의 시간을 넘기는 소리 풍경 속으로 들어갔다네
대나무 숲에서는 악보 넘기는 소리 창창거렸고
말채나무 엉긴 수피에서는 지르르르
제 몸 터지는 소리가 났다네
어디서 날아왔는지
딱새 두 마리 쏴르르 날아다니며
나뭇가지 흔들거리자
순간, 쉬 쉬 쉬 소리를 지르는 쉬나무
키를 늘리던 그림자 마저 소리없이 산속으로 들어가
하늘 복판에 펼쳐두었던 경전 흐릿하게 보이는 시간
어디서 달려왔는지 구겨지지 않는 둥근 달 별 몇개 끌고 나와
나무의 경전을 비추고 있었네
철당간 달 그림자 몸으로 받아내며 숲을 빠져나와 부스스
일주문 걸어나오는 데
어느 새 내 몸의 그림자마저 둥글게
지상의 무늬로 남아있었네
갑사 / p r a h a
Dream Of Love & Fufillment - Ralf B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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