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배 시집]부론에서 길을 잃다
부론에서 길을 잃다
부론은 목계강 하루 어디쯤
초여름 붉은 강물을 따라가다 만난 곳이니
하류의 마을일 것이다
가슴에 나는 강물 소리를 들으며
가을 건너고 겨울 건넜다
나는 그 긴 계절을 부론에 머물고 있었다
부론에 눈발 날리고 까마귀들이 날았을 때
부론의 붉은 하늘이
언 강 껴안고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목계강은 강물 향해 나아가지 않았다
강물 가득 부론 담았던 목계강은
더 깊은 소리로 부론을 불렀다
부론은 지상에 없었다 부론은
내 가슴에 남아 쓸쓸히 낡아갔다
나는 부론을 떠나고 싶었으나
지상에 없는 부론은 출구가 없었다
나는 부론에서 길을 잃었다
부론은 내 몸의 오지였다
석포리 가는 길
석포리 가는 길은 바람길이다
바람이 길을 내고 길은 바람 속을 흔들리며 간다
서해가 내륙 깊숙이 찌르고 들어와
비수로 박힌 석포 들판, 이미 많은 길들에
사타구니를 열어주었으니 길이
다른 길을 달고 달아나 석포리의 길은 늘
바다의 날카로운 끝에 선다 바람 속의 길은
위태로운 칼날 위에서 잠들었으므로
바다를 가두던 가슴 속 출혈은 멈추지 않는다
폐염전은 검붉은 혈흔 위에 있다
바다를 말리던 바람과 햇살이
갈대꽃 위에서 쓸쓸한 한 생을 뉘우칠 때
이곳에서 투명한 몸을 이루어 떠난 소금의
길은 나를 떨게 한다 갯벌 아래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검붉은 해초
서포리의 폐염전에 솟아오른다
검붉은 해초가 피워올린 소금꽃으로
석포리의 염전이 환해진다
독곶리의 겨울
해안으로 달려나간 구릉지, 마른 갈대들이
거칠게 서로를 부른다 박새떼가 날아오르고
노동자들 숙소로 지어진 낮은 막사로
자우룩한 모래 바람이 몰려간다
갈기를 세우는 바다를 향해 질주하던
국도 29호선을 멈추어 서게 한
독곶리의 모래 바람, 땅콩밭을 덮었던 폐비닐이
모래 바람을 앓고 있다 유화단지를 건설하던
젊은 노동자들 거친 모래 바람 견디며
국도 29호선의 끝을 보았을 것이다
길이 이처럼 허망한 끝을 보일 때
내가 달려갈 길을 조용히 접고
노동자들의 더러운 막사로 들어
길 위의 모든 죄를 자백하고 싶다
나는 자동차 시동을 끄고 길의 끝에 선다
모래 바람이 나를, 나의 생각을 삼킨다
쑥부쟁이 마른 대궁, 모래 바람 속으로
이미 끝난 길을 떠난다 우우 쓸려가는
저 메마른 것들의 들리지 않는 비명
새의 무게가 나를 이긴다
밤마다 새들이 검은 호수를 건넌다
새들의 붉은 눈빛이 호반에 걸려 있다
호반 서성이며 탕진하던 젊은 날,
호반 건너는 새들의 깃털에 얹힌
생의 무게를 만나기는 했으리
새들은 하늘길을 버리기도 하고
한 계절의 끝을 타고
호반으로 돌아오기도 했으나
그 계절 내내 나는 어둠 깊어
새들의 날갯짓 소리 듣지 못했다
호반에 찍힌 새들의 무수한 박자국이
영혼 깨울 때까지 나는 늘
새들의 붉은 눈빛 속을 맴돌며
새들이 끌고 가는 검은 길들의 침묵을 보았다
호수를 건너고 있는 저 많은 새들
누군가의 영혼을 날아 그를 깨우리라
새 한 마리 내 안으로 선회한다
무리를 버린 새의 낮은 날갯짓이 서늘하다
새의 무게가 나를 이긴다
서안에서는 사람이 빛난다
서안을 밟았던가 혹 서안이 나를
밟고 지나간 것은 아니던가 모래 바람
내 안 가득하니 시간의 켜켜에 깃들인 뼈들
메마른 기침을 한다 여름 아지랑이 속의 서안은
타클라마칸을 향해 가는 가물가물한 통증이었다
황토 분진의 서안이 조용히 사막을 향해 가며
성곽, 그 견고한 언약을 허물고 있는데 내가
나를 허무는 통회의 서안에 전설처럼 어둠 온다
서안에선 백 년이나 2백 년은 순간이어서
나는 먼지처럼 가볍다 언약의 가벼움을 말하던 너는
나보다 먼저 서안을, 아니 시간의 켜켜한
골짜기를 알고 있었나 보다 별들 흐려
부끄러운 서안의 밤하늘,
사라진 이름들 보일 듯하다
호텔로 돌아오는 불결한 도로에는
사람들이 넘친다 저 많은 서안 사람들을
이끌고 가는 언약의 힘을, 그 굴종과 배반의
아름다움을 서안 사람들 표정에서 읽는다
아직도 도굴되지않은 언약에 대한 믿음이
정금처럼 빛나는 저 묵묵한 서안 사람들
순례자
낡은 사원을 순례하기 시작했다
사원은 젊은 날 지워지지 않은 지문이 이른 강물
고요히 잠겨 풍경을 흔든다
돌계단 오르는 무릎에서
바람 든 풍경 소리 들린다
돌계단 지나 풍화된
긴 시간의 회랑 돌아갈 때
젊은 사제 향로를 흔들며 지나가고
소리가 사라진 시간 속으로
사원의 낡은 그림자 키를 늘리면 해진 생각들
사원의 그림자에 걸린다 가벼워진
돌기둥들 서로 부딪쳐 대숲처럼 울고
윤회나 환생은 어두웠다
생각이 파내려간 미로를 더듬어
한 출구에 도달하겠지만
거기에 먼저 와 있는 절망하는
이름들 낡아가고 낡은 것들의 영혼
힘겨운 순례길에 동행한다
사원을 강물처럼 흘러간 기원들
몸 곳곳에 미라로 누워 있다
그래도 나의 순례는 멈추지 않는다
봄
석남사 솜양지꽃 물속 같은 세월 지키고 있다
그 조용한 시간의 켜 속에
길고 느린 그림자 절집 오른다
허물고 다시 세우기를 거듭하는 절집
시간이 소멸로 가는 정적 깊게 쌓는다
느린 그림자 정적에 들어 움직이지 않는데
봄 석남사에는 꽃잎이 시간을 밟는다
가문비 나무숲에 대한 기억
내소사로 드는 가문비나무 숲길에
너를 묻도 떠나왔으니
숲의 기억은 너를 넘어 선명하게 살아난다
그날 왜 선운사 피지 않은 동백을
가슴에 담아 줄포까지 내달았는지
몸보다 말을 아끼던 너를
호랑가시나무 날카로운 잎새로 달래며
내소사 가문비나무숲으로 들었을 것이다
줄포, 꿈길처럼 부드러운 해안선
붉은 햇살을 되쏘며 숲으로 밀려올 �
너는 왈칵 세상 쏟았다 나를 쏟았다
소멸하는 빛의 두려움 먼저 읽었던 너를
그 숲길에 묻으며 나는
소멸하는 것들의 광폭한 꿈을 꿈꾸었다
죗값이라면 평생
멀리 있는 별 하나 품고 살 것이다
가문비나무숲에 고여 있던 시간이
내 생애를 관통하는 화살이 된다
[김윤배] 부론에서 길을 읽다-문학과 지성사
김윤배
충북 청주 출생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하고
인하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과정 수료
1986년 '새계의 문학'을 통해 시단에 나와
시집[겨울 숲에서][떠돌이의 노래]
[ 강 깊은 당신 편지]
[굴욕은 아름답다]
[ 따뜻한 말 속에 욕망이 숨어 있다]
산문집 [시인들의 풍경]이 있다.
Richard Yongjae O'Neill - Winter Jour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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