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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사산행

선비의 고장 영주 소백산자락 봉황산 부석사

 
의상을 흠모한 여인의 혼이 서린 鳳凰山 浮石寺
[글.사진 / 2009. 1. 10. 雲岳.기산들]

 

 영주.

백두대간이 북으로 향해 달리다가 태백산에 이르기전 거대한 산을 들어 올려 놓으니 바로 소백산이다.

단산면 좌석리에서 마락으로 넘어가는 고치재가 소백산과 태백산의 경계로 동쪽은 태백산의 종말봉이고 서쪽은 소백산

의 시백봉이다. 이들 산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자락에 터 잡은 영주는 옛 부터 선비의 고장으로 현재까지 그 정신

고집스럽게 이어 오고 있다. 소수서원을 비롯 선비촌.선비문화수련원등 현대판 선비를 양성하는 뿌리깊은 정신문화

의 산실이며 인심 넉넉하기로도 입소문이 자자한 곳이다.

 

필자의 오늘 길 떠남은 강원 태백시의 태백산을 정하고 출발하여 안동 왜관 예천을 지나자 불현듯이 몇해전 소백산 답사

산행시 너무나 친절하게 길손들(필자.김상복 부회장)을 대해준 영주 사람들이 생각나 그만 이곳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고치재서 발원한 물은 단산면의 구계천이 되어 죽계와 남원천과 합류하여 영주의 서천이 된다.

 

서천은 다시 내성천과 해후하여 낙동강으로 흐르는데 동(東)은 태백산 서(西)는 소백산으로 두 白山사이에

오늘 필자가 걸음을 멈춘 영주가 있다.       

 

 

 오전11시경 집을 나섰으니 영주에 도착하니 늦은 오후 소백산을 오르기에는 너무 늦어 내일 아침 비로봉을 오른후

하산하여 돌아가기로 하고 2번이나 소백산을 오르면서 단 한차례도 가보지 못한 "부석사"를 오늘 찾기로 했다.

부석사는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번지에 소재한 해동화엄종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孤雲寺

의 말사로 신라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의상대사가 676년에 창건하여 화엄종을 널리 전한 가람이다.

 

고찰이요 불교의 명승지인 탓에 부석사를 오르기전 초입 주차장은 그 명성에 걸맞게 큰 주차장과 위락시설들이 잘

정비되어 여행객들을 맞는다. 겨울이 깊어감은 노점상앞 솥에서 모락모락 피는 오뎅국물의 김과 저자거리를 방불케하는 

토속 농산물을 판매하는 노점상들의 연로하신 노친들이 피운 장작 숯더미의 빠알간 불에서 세삼 느낄수가 있다.

 

지난 가을 고운빛으로 중생들과 길손들을 상쾌하게 맞이했을 줄지어선 은행나무도 환상의 시간들을 저만치 밀어놓고 

희미하게 신작로에 내려앉는 한줌 볕을 서로 안기 위해 긴 가지를 펼친 모습에서 먼 타향의 겨울이 그렇게 춥게 느껴지

지 않는것은 밝은 미소로 사람들을 보듬은 부석사의 넉넉함 때문일까? 

천왕문앞 계단에서 예쁜 포즈를 취한 여인에게 환한 미소로 셔트를 누르는 청년의 모습이 속세의 고단함을 잠시지만 

떨쳐낼수가 있어 해거름 부석사를 찾은 길손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준다.    

  

 

 경내에 들어서자 봄볕같은 화사함이 고찰을 비추어 북풍한설에 실려온 길손의 외로움까지 가시게한다.

東 西에 배치된 3층석탑의 고색이 종교를 떠나 문화재로서 인상깊게 느껴지며 화려한 단층이 없는 순수함이 풍경소리

를 더 애잔하게 할 것 같아 길손은 여기서 옷깃을 여미게 된다.

이 탑들은 신라 후기의 3층 석탑으로 쌍탑이다.

이중 기단위에 3층의 몸돌을 올린것으로 무량수전의 동쪽에 있는 석탑과 같은 형식의 탑이다.   

 

 

 부석사는 의상이후 혜철을 비롯 신라 무열왕의 8대손인 무염과 징효등 고승이 배출되었으며 1372년 고려 공민왕 21년

원응국사가 주지로 와 가람을 크게 중창했다.

경내에는 고려시대의 무량수전(국보 제18호)과 무량수전앞 석등(국보제17호)조사당 (국보제19호)조사당벽화(국보제46호)

3층석탑(보물제249호)당간지주(보물제255호)등과 원각전.응진전.안양루.선묘각.법종루.자인당등의 조선시대 건물도

산재해 신라.고려 조선이 공존하는 사찰이다.

 

 그리고 부석사는 창건 설화와 관계가 되는 석룡.대석단.선묘정.녹유전.선비화등이 전해져 신비하다.

산사에 머무는 나그네 등 뒤로 겨울볕은 오그라들고 허허로운 세상사 오늘 만큼이라도 무념에 들어 하얗게 비우고 

묵언정진하는 구도자가 되어야 겠다고 다짐해 본다.

불사가 없는 고요한 경내는 젊은이들의 힘찬 소리만 간간히 들려온다

 

                                                                                           부석사 안양루

 

 지극한 믿음은 지극한 아름다움을 준다고 은빛 숲속의 팔공산 은혜사를 찾은 어느 논객의 글이 생각난다. 

교과서에서만 보았던 무량수전을 처음 대면하는 필자는 교과서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역시 색깔없는 

단층이 따뜻하게 보이고 지극한 아름다움이 돋보여 치장이 능사가 아님을 느낄수 있다.

 

                                                                                                 무량수전                       

부석사의 중심 건물로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아미타여래불상을 모신 무량수전은 신라 문무왕때 짓고 고려 현종때인

(1009-1031)때 고쳐 지은후 공민왕 7년(1358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지금의 무량수전은 고려 우왕 2년(1376년)에 새로 짓고 광해군때 새로 단청한 것으로 1916년에 해체 수리 공사를 

한후 현재에 이르렀단다. 겨울방학을 맞은 학생들이 문화재 탐방과 추억을 위해 많이 모였다.

 

                                                                           삼층석탑

우리는 여행을 통해 또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된다.

허지만 길 위에서 만나는 풍광들은 처음 출발할때 기대했던것 만큼 상쾌하지 않을때가  수두룩해 속상하다.

청정자연의 파괴. 쓰레기와 소주병들이 뒤덮힌 여행지에서의 허탈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하는데도 

순간만 지나면 다시인간들은 자연을 병들게 하는 범죄를 서슴치 않고 있으니 서글퍼다.

그러나 오늘 부석사의 여행은 경내에 고스란히 녹아있는 역사와 문화를 함께 즐기고 갈수 있어 길손의 마음이 편하다.

   

 부석사엔 갖가지 설화가 무성해 여행의 맛이 더 깊다.

태백산 부석사를 봉황산 부석사라 불려지는것도 특이하고 의상이 당나라 유학후 귀국길에 그를 흠모한 여인 "신묘"

가 용이되어 안전한 뱃길을 열어줌은 물론 이곳 봉황산에 절을 창건할때 나르는 바위로 변해 이곳에 숨어 있던 도적떼를

물리쳐 줄곧 의상을 도운 설화는 재미가 있다. 

 

또 한 조사당 앞 구조물에 싸여져 보호 되고 있는 나무는 의상이 사용하던 지팡이를 꽂아둔것이 살아 잎이나고 가지가

생겼다는 설화는 우화에 가깝지만 정겹다.  

 

 

 

  

 구도의 길이 험난하듯 안양루를 오려는 계단은 가파르다 이어 펼쳐지는 극락의 세계는 중생이 두 팔을 벌려 

온전히 부처를 안을수 있는 무량수전의 배려는 건축의 문외한인 길손에겐 그 구조가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는 전혀

모르지만 이 겨울 가슴속이 따뜻해지면 더 이상 바랄것이 무엇이겠는가?

어느새 해는 뉘엇뉘엇 안양루 지붕에 걸려 길손보려 속세로 다시 향하라며 등짝을 슬쩍 민다.

내일은 칼바람 무섭게 몰아칠 소백산 비로봉을 올라야겠다.

 

  

 

 

                                                                            선묘의 혼이 된 선돌 (부석)

 

 

 

 그리고

영주 순흥고을에서 만난 묵밥에 요기를 채우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시골 정류장앞 여인의 기다림이 

영락없는 겨울밤이다. 

희미한 불빛을 뒤로 하고 길손은 하루밤을 뉘일 잠자리를 이리저리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