뭍에만 길이 있는줄 알았다. 오늘에야 비로소 바다에도 내가 걸을수 있는 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다로의 길, 그 길을 가기위해 후배와 길을 따라 장승포에 도착해 지심도로 가는 선착장에 닿으니 비린내는 멀미가 되어 굼틀거린다. 배는 바람을 가르며 옥빛바다에 하얀 흔적을 남기더니 오랜 그리움이 붉은빛으로 드러누운 지심도에 우릴 데려다 놓는다.
장승포 선착장의 아침풍광, 마른 고기를 진열하는 아낙네의 손끝에 이미 봄은 와 있다. 낮선땅과 의 첫 만남, 심장은 갯여울처럼 잔잔하게 요동을 치고 설레임은 대양을 건너오는 봄아지랭이 마냥 너울이 된다. 지심도(只心島). 어둠을 천천히 밀어낸 여명처럼 섬은 그렇게 천천히 내게로 오고 그 작은섬 공간의 정체성을 유두빛보다 더 붉은 동백꽃숲에서 쉽게 찾을수 있다.
쪽빛바다가 아우려 마음을 띄운 섬, 희열과 비애보다는 동경과 호연,그리고 겹겹으로 싸인 내 안쪽 그리움의 존재를 찾을수 있는 애절함이 묻어나는 지심도. 오늘 실상의 공황을 잠시나마 이곳에다 내려놓기위해 함께 길을 나선 후배와의 여행길은 주머니의 넉넉함은 없지만 마음은 더 없이 호사스럽다. 그래서 "동행"은 믿음과 여유 아름다움을 가져다 준다.
원시의 동백숲이 있는 지심도는 우리 실상에 대한 "은유"인지 모른다. 붉은빛의 꽃망울은 밝음, 해풍에 닮아 더 검푸른 이파리는 어둠, 그것은 낮 과 밤 그리고 빛 과 그늘인 명암(明暗)으로 공존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존재감을 부각시키는 반복과 변화의 방식에 길들여져 있다. 따라서 지심도의 동백숲길은 시인의 길도 된다. 아니 그 숲길에 서면 모두가 시인이 된다. 유두빛 보다 더 붉은 동백, 겹겹의 그리움을 하나씩 벗기듯 피었다. 선착장을 올라 ㄱ자처럼 굽돌아 나가면 바로 동백숲길의 시작이다. 호화롭지 않은 민박집이 마음에 여유를 주며 느림의 시각을 알려 조금은 흥분된 마음들을 진정 시켜 샛끝벌여의 파도가 포말이 되는 망루로 데려 간다. 지심도도 비운의 섬이였다. 조선 현종 45년에 15가구가 이주하여 터를 닦고 그 후 치욕의 한일합방으로 일본군이 이 섬을 요새화 하면서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광복직전 까지 침략자들의 교두보 역할을 했던 곳 이다. 현재도 13가구 약20여명의 주민들이 과수와 민박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살고 있다.
일본군의 별채로 추정되는 건물. 어두운 동백숲길을 지나 일본군 별채로 추정되는 낚은 건물을 만났다. 건물앞 동백은 그 시절 통한의 역사를 서러워하듯 붉게피어 애잔한 마음을 가지게 하지만 언덕배기에 개간한 작은 남새밭의 홍매는 해풍을 맞고서도 이른 봄을 피우고 있어 이제 봄은 거침없이 쪽빛 바다를 건너 뭍에 닿을것이다. 동백숲의 끄트머리에서 만난 윤기 흐르는 대숲은 꼭 숨박꼭질에서 술래에게 들킨 사람처럼 무안한 얼굴이 되어 길손을 반겨 괜히 내가 미안하다. 아름드리 해송은 숲에서 한걸음 물러나 단호하게 몰아치는 해풍과 맞서며 숲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냉정을 잃지않고 의연히 서 그 존재감을 과시한다.
소녀의 유두마냥 수줍게 솟는 지심도의 동백. 후배는 망루에서 시작도 끝도 없는 그저 여행의 본질만 느끼는듯 하다.
필자가 느낀 지심도는 섬과 뭍을 구별하지 않는다. 아니 기만적인 처세로 세상을 휘청거리게 하는 뭍 보다 오히려 과도하게 확신할수 있는 믿음이 사람들을 끌어 안는다. 민박집 아낙의 마음이 그러하고 좁은 숲길이 ... 그리고 원시의 동백나무가 선물한 "느림"이 더욱 그렇다.
부부가 밀어를 나누고 있어 다가 갈수 없었던 해안선 전망대는 남해 그 파란물 구비쳐 오는 바다를 가슴에 안을수 있는 탁 트인 전망대로 찬물 고랑의 해벽이 압권이다. 통영8경의 하나인 연화도의 용머리와 비슷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이곳 풍광 역시 육지와 등지며 산다. " 다들 제 잘난멋에 사는게" 인생이라면 섬 역시 한걸음 물러난 삶처럼 살든 아니면 냉정하게 날을 세우며 살든 내 알바는 아니지만 최소한 지심도는 바다가 섬과 뭍을 갈라 놓았을 뿐 이지 섬 같지만 뭍 과 같은곳이다.
하늘을 찌를듯한 동백나무숲이 끝나자 마자 하늘과 바다가 열렸다. 그리고 일제 침략군의 잔재인 포진지와 탄약고가 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며 두사람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무관했던 시절에 태어난 사람들이지만 내 땅위에 힘센자들이 남긴 상흔이라 생각하니 저절로 서글퍼 진다.
주둔했던 일본군의 포진지. 2문이 설치되어 운용된것 같다.
등나무 민박집의 넉넉한 주인 아낙은 학꽁치에 소주를 내어 주면서 본채인 와가(瓦家)는 일본군 병사의 막사 즉 병영이었다고 말한다. 아우와 둘이서 틀림없이 일본군들의 건물이라고 짐작한게 입증된셈, 이곳 지심도의 토지 소유는 국유지로 국방부 소관인것 같고 주민들은 건물의 소유권만 가지고 있다. 놀랍게도 여기 건물 한채가 1억원을 호가 한다니 필자가 놀라는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 민박집 낚은벽의 낙서중 유독 눈에 띄는게 있다. "지랄같은 날씨에 왔어도 심히 기분좋군 도저히 우리나라 섬인가." 한잔술에 취해 그때의 심정을 적은 사람이나 "사랑한다 봉화" 라며 연인의 이름을 적은 사람 모두 지심도의 추억은 생전 살아 떠오를 것 이다.
세상의 모든 인연을 버리고 이곳으로 와 글이나 쓰며 살고 싶은 욕망 마져도 작금의 세태엔 현실 도피고 사치라 생각되어 오늘 가슴에 담은 이 한폭의 수채화는 아쉽지만 고스란히 이곳에다 두고 갈까? 느림이 있었던 순간들도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유람선의 엔진소리로 조급해진다. 부드러운 바다와 유두 같은 동백꽃이 자꾸만 눈에 삼삼거려 머물고 싶지만 시간은 두 남자의 여행길을 졸지에 섬을 밀쳐내며 바다를 건너려 한다.
마끝 벼랑. 망루처럼 이 섬의 시작점이자 끝점이다. 해벽을 때리는 파도가 운다. 발밑 시퍼런 바닷물은 소용돌이가 되어 엉엉 운다. 한손에 담을수 있는 바다가 이렇게 서럽게 우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 ! 그것은 봄을 잉태하기 위한 지심도 쪽빛 바다의 산고였다.
상상할수 없는 큰 기대로 여행길에 나서지마라 특히 다녀온 사람들의 입소문이나 글을 보고 꿈의 여행지로 생각하며 길을 나서다 보면 분명 실망만 안고 오는 여행이 된다. 나의 여행이 되려면 나만의 생각으로 그곳을 만나야 한다.
지심도는 분명 여유가 있는 여행지다. 남국의 정취가 나거나 환상의 섬은 아니지만 때묻지 않은 원시의 동백숲과 화려하지 않아 더 편안한 민박집, 그리고 그곳에 사는 그들이 참 정겹다. 발끝과 눈(目), 마음이 편해지던 동백숲길로 밤새 뒤척이게 하던 붉디 붉은 그리움은 적어도 오래전 부터 앓고 있었던 작은 그리움 하나는 만나고 가니 그 고마움에 길손의 마음 한조각은 여기에 두고 간다. "형님 오늘 불려 주어서 고맙다"는 후배의 마음에 왠지 미안한것은 간혹 혼자 떠나는 여행길에 부르지 못한 소원함이 있기 때문이다. 배는 어느새 지심도를 저-만큼 밀어내고 있다. 봄 오면 가파른 황토 마루에 노오란 유채꽃이 바다를 물들이는 섬 욕지도. 그곳에 학처럼 살다 이승과 이별한 친구가 바다로 누운 욕지도에 후배야 우리 가자. 잘 아는 아웃도어 갤러리에 들려 화사한 봄옷으로 겨울을 벗고 날듯이 그곳으로 가자.
지심도 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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