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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마여행

서해 파도는 아직도 숨죽이고 있었다.

서해 파도는 아직도 숨죽이고 있었다.
 [글.사진 / 기산들 ]

 

서해 태안 주변의 기름유출 사고는 분명 온 국민의 가슴을 아프게했던 대 사건이였다.

정부는 물론 온 국민의 정성으로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 올 여름 차질없이 만리포를 비롯하여 꽃지등 수십개의 해수욕장

들이 개장을 하였다는 소식은 접하였지만 예년에 비해 40%정도의 피서객이 이곳을 찾았다니 서글픈일이다.

반면에 부산 해운대를 비롯 동해안은 발디딜틈도 없이 많은 인파가 몰려 더 더욱 착잡하다.

 

추억 아름다운 서해로의 길,

서울 근교라 그런지 차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그기다가 무슨 통행료를 징수하는곳이 여러곳인지...

달리는 차창밖으로 갸느린 허리를 흔들며 하늘을 향해 발돋움하는 코스모스의 행렬은 무덥지만 가을이 천천히 손에

잡힐듯 하건만 마음만 앞서지 후덥지근한 열기는 포도위로 뒹굴어 남으로 기수를 돌린 필자의 뇌리엔 수년전 대중에

자주 불려졌던 남행열차가 갑자기 생각난다. 

 

 

6차선 서해대교를 지난다.

희뿌연 열기와 개스는 장장 7,310m 대한민국 최장의 다리마져 회색빛으로 만들고 바다의 물빛도 회색에 가까워 푸른

바다위 하늘의 구름처럼 둥둥 떠 있을 아름다운 다리를 갈망했던 길손의 바램은 강하게 부는 바람에 실려간다.

경기도 평택의 동승면 내기리와 충남 당진군 신평면을 잇는 서해대교가 7여년의 공사끝에 2000. 12. 5. 개통 되었으니

늦어도 한참 늦게 필자는 서해대교를 찾아온 것 이다.

 

행담도를 찾아 들어갔다.

아산만에 위치한 당진의 작은섬인 행담도는 서해대교가 놓이면서 휴게소가 생겨 교량의 전망과 아산만 풍경을 보기

위해 차량들과 사람들이 빼곡하다. 

희미한 서해대교를 카메라에 담은후 불현듯이 덕숭산자락 추억의 수덕여관이 보고싶어 네비에 수덕사를 입력 한후

출발했다. 움푹파인 초가 지붕이 위태했지만 당대의 페미니스트였던 두 여인 아니 세여인(여관 주인 박여사. 이응로

화백 본부인)과 세남자(이응로.김태신.송만공)의 애절한 사연이 길손의 마음을 자꾸끈다.   

 

 

그러나 2년전 길손의 가슴에 푸른산처럼 각인 되었던 수덕여관의 모습은 사라져 해거름에 여관문을 들어서는 길손의

마음을 서글퍼게 한다. 신여성시대를 대변했던 일엽과 나혜석 그들의 이야기는 세상 모든것들 역시 영원할수도 없고

사랑과 결혼 역시 잠시 이승에서 머물다 가는 행위임을 일깨워 세상사 다 부질없음을 대변한다.

그리고 속세와 출가의 참의미가 무엇인지를 깨우쳐 주는 전설같은 삶에 한 시대 자유를 풍미했던 그들의 삶이 부대

끼며 사는 우리보다 몇십배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1934년 이혼의 상처를 추스리기 위해 수덕사에서 정진 수행중이던 신시 여류시인이었던 일엽(성은 김씨)을 찾아온 

같은 신 여성이며 화가였던 나혜석이 이곳에 등장 하면서 수덕여관은 소설같은 이야기의 무대가 된다.

곰팡이 냄새와 때묻은 문지방, 찢어져 덕지덕지 붙인 벽지, 흐른 세월 만큼이나 담장이 덩굴이 빼곡히 감싼 굴뚝,

내실과 방호수를 적은 나무명패 그리고 툇마루등 옛것은 다 어디론지 사라지고 새로 정비한 수덕여관은 더 이상 

길손의 추억을 기억하기엔 생소하다.  왜 만공은 나혜석이 일엽과 같이 수행의 길을 걷고자 애원했을때 너는 중이

될수없다며 속세로 되돌아가기를 질타했을까? 음탕한 끼가 상에 나와 있었을까?

그리고 일엽에겐 왜 붓 까지 꺾어라며 불도의 길을 걷게 했을까?  길손의 좁은 소견으로는 그 의도를 모르겠다.     

                                 

 

지금은 수덕사가 이 여관을 매입하고 예산군이 자연문화유산으로 지정하여 얼마전 개보수를 하였는지 길손의 추억터에

자리잡았던 수덕여관의 그때 그 모습이 없어 카메라에 담지 않고 수덕사를 향했다.

대원군이 10여년간 왕재의 터를 찾아 헤며던중 정만인이라는 지관이 찾아와 가야산 자락에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의

땅이 있다며 소개하여 2만냥을 가야사 승려들께 주어 방화케 하고 전소된 그 터에 아버지 남연군을 모셔 2대에 걸쳐

왕을 만든 명당중 명당이 도립공원 가야산자락이다. 

그 가야산 둘레에는 100여개의 크고 작은 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개심사와 덕숭산자락에 터 잡은 우리에겐

가요 수덕사의 여승으로 더욱 잘 알려진 벽제 목조건물의 걸작이며 1962년 국보제49호로 지정된 700여년의 건립 역사

를 지닌 대웅전이 있는 수덕사가 있다.

해질무렵의 수덕사길은 호젓해 혼자는 너무 쓸쓸하다. 그리고 오후6시가 넘은 시각에도 입장료를 받고 있다.

       

 

어둠이 천천히 다가선다.

이 절 불교대학 수강생들이 저녁 예불을 하기 위해 열을 지어 대웅전으로 향하고 범종은 세인들에게 공양시간을 은은히

알려주어 먼 길 달려온 길손 그때서야 허기를 느껴 서둘러 너른 경내를 지나 계단을 내려서는데 마당 끄트머리 돌의자

에 앉은 길손들은 무슨 영문인지 속세로 돌아갈 미동도 안보여 참 의아하다.

소리없는 어둠은 그리움보다 더 외롭게 느껴져 이방인의 발길은 해거름만 되면 더욱 더디다.

 

 

 

내포의 너른 들판과 500여년 영욕의 세월을 함께해온 해미읍성필자에겐 또 다른 추억의 장이기도 하다.

백두대간의 속리산 천황봉에서 갈라진 금북정맥이 서해로 내달리다 태안 안흥진에서 그 힘을 소진하기전 마지막으로

안간힘을 쏟아 들어올린산 가야산(678m). 2년전 송년낙조 산행지로 단독 산행하면서 하산길을 놓쳐 금북정맥길을 따라

예전 모 재상의 엄청난 면적의 목장을 헤며다 박아무개 목부의 도움으로 길을 찾아 밤중에 하산한 기억이 새롭다.

기름진 내포땅을 왜구로 부터 지키기 위해 1491년(조선 성종22년)에 축성한 해미읍성은 임란때 이순신장군이 잠시 부임

했다가 후에 군사적 중요성이 떨어지면서 충청병마절도사의 사령부였던 이 성은 덕산을 거쳐 청주로 옮겨가고 조선 말기

대원군이 천주교 박해 당시 충청도 신자들이 이곳으로 잡혀와 고문을 당하며 순교한 감옥이 된 곳이기도 하다.

특히 1866년 박해때는 무려 1000여명이 이곳에서 처형을 당한 영욕의 땅이다.

성안 너른 터엔 천주교인이 갇혀 있었던 감옥터와 처형장이였던 회화나무가 처절했던 그 때를 묵언으로 전해줘 길손의

마음이 숙연해진다. 2년전 찾아 왔을때는 성루와 성벽을 환히 밝히던 야경이 참 아름다웠는데...  

 

   

서해안의 진주라 불려지는 대천 무창포 해수욕장.

매달 두번씩 바닷길이 열려 모세의 기적을 연상케하는 해변이 썰물처럼 허전하다.

텅빈 평상과 파라솔.

해변엔 그나마 소금병을 바닥에 뿌려 맛조개를 잡는 일단의 가족들의 손놀림이 없다면 아직도 태안반도를 비롯한

우리들 서해, 필자의 추억이 구름처럼 피는 서해는 아직 푸른파도 마져 숨을 죽이고 있다.

만리포의 그 밤.

갓 구운 조개구이에 술잔을 기울이다 잠자리에 들어도 밤새 파도는 뒤척이며 길손의 잠을 깨우던 그때의 서해는

언제쯤에 다시 만날수 있을까?    살아있는 생명을 찾기위한 자원봉사자들의 부릅뜬 눈이 사슴보다 더 애잔하다.

이제 익산 - 육십령 고개로 가는 새로 난 길을따라 집으로 가야겠다.

   

 

 

그래도 아이들은 두꺼비집을 만들어 서해를 보듬고

 

엄마와의 진한 추억을 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