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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마여행

과거길, 문경새재

과거길, 문경새재
[글.사진 / 기산들 ]

 

 이 길,

영남대로(嶺南大路)의 분수령인 문경새재.

급제한 선비에겐 환희의 고개가 되었겠지만

낙방거사가 된 사람들에겐 비애와 원망 한서린 고개도 되었을 것 이다.

또 한 주모의 교태에 옆구리에 찬 노잣돈 다날리고 후년을 기약하며 과거길을 과거길로 돌린 서생들도 더러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문경새재는 청운의 꿈을 안은 사람들과 거상을 꿈꾼 보부상들 그리고 물처럼 바람처럼 유유히 떠돌며 풍류를 즐긴 길손

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하고 구름처럼 넘나들지 않았을까?     

  

 

새재길 주흘산릉이 운무에 가려져 신비롭다.

 

 

문경새재는 주흘산,조령산 그리고 드라마 촬영장이 있어 유명한것이 아니다.

이 길위엔 예전 한양(도성)과거 천리길에 나서는 영남 선비들의 긴 여정중 중간 지점으로 휴식과 애환이 서린 고갯길이기에

지금도 길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길 체험 현장으로 조성된 흙길 영남대로 중간ㅇ중간에는 옛 과거길이 있어 그 길을 걷는 기분은 특이하지 않을까?

오늘 우리 모두 조선시대 선비들이 되어 옛 과거길에 한번 서보자.

짚신 수십켤레 걸망에 달고 줌치에 노잣돈 챙겨 주모들 볼연지하고 기다리는 문경새재를 넘어보자.

  

 

문헌에 의하면 문경새재는 조선태종 14년(1414년)개통된 관도(官道)즉 벼슬길이다.

영남지방(낙동강유역권)과 기호지방(한강유역권)을 잇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도로로 과거길은 물론 보부상들의 생계를 위한

고난의 길이기도 하였다. 영남제일문인 조령1관문을 들어서기전 우측 공터 작은 소나무엔 입신양명을 비는 부적들이 깃발로

나부껴 기분이 참 묘하다. 젊은 연인들은 개나리 봇짐에 짚신을 달고 이 길을 따라 한양으로 간 예전 선비들의 노고를 알려나?

조선팔도를 통털어 가장 유명했던 영남대로의 대명사 "문경새재"그곳은 옛조선의 나그네가 느꼈을 느림의 미학이 있었다.

      

 

 수백년 역사와 애환을 간직한 고개.

홀로 그 시절 사연들을 생각해본다.

그리고 희망과 좌절들이 표류하는것을 상상하며 제2관문을 갈려던 산객의 발길은 어느새 주흘산길로 접어들고 만다.

병이다. 치유할수 없는 산으로 가는 병.

 

  

백두대간을 붙잡아 베개를 삼은 주흘산(1106m)은 문경을 대표하는 산임에는 틀림이 없다.

따라서 문경하면 물론 "새재"가 있지만 그보다는 주흘산이요 주흘산하면 바로 좋은 소식을 듣게 한다는 문경을 떠올리게된다.

곡충골로 들어섰다.

수량은 적지만 골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와 지겨운 폭염을 북돋우는 매미소리가 귀를 멎게할 정도로 울어댄다.

주흘산길은 새재에서 제1관문인 주흘관을 들어서 우측 곡총골로 들어 여인의 궁을 닮았다는 여궁폭포 혜국사 대궐터 샘터를

경유하여 정상과 주흘영봉, 꽃밭서들을 지나 제2관문인 조곡관을 거쳐 영남대로로 하산하는길을 제일 선호한다.  

 

                                           

 

가느다란 물줄기를 내려보내는 여궁폭포.

무엇이 여인의 그것을 닮았는지 남설악 주전골 여심폭포는 빙폭으로 그 생김을 볼수가 없었지만 주흘의 여궁은 선명하게

볼수 있지만 산객의 눈에는 그저 평범한 폭일 뿐이다. 다만 수량이 많았다면 그 웅장함이야 있겠지만 ...

폭포를 지나자 된비알길을 만났다.

뒤따라오던 대구의 등산객 2명에게 길을 비켜주고 혜국사 분기점에서 산객은 절로 향하지 않고 곧장 비탈길로 접어 들었다.

굴참나무와 적송에서 내뿜는 향을 맡고 널다란 공터에서 시끄러운 매미소리를 들어며 물한모금을 마시자 아래쪽에서

인기척이 난다. 아까 여궁폭 위에서 만났던 그분들이다. 왜 이제 오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들은 혜국사에 들렸다 온단다.

 

 

주흘산은 예로부터 나라의 기둥이 되는 큰 산으로 분류되어 조정에서 매년 향과 축문을 내려보내 제사를 지내던 신성한 산이였다.

야무지게 한땀을 흘리며 대궐터에 도착하니 대궐터 샘터가 산객을 기다렸다는듯이 반긴다.

이 물맛을 어디에 비할까? 얼마나 시원한지 한기가 서려있다.

 

 

 지능선길을 따라 정상을 향해간다.

소리없이 다가오는 운해는 숲을 송두리채 삼킬듯이 달려들고 그 무거운 형상은 산객의 숨까지 차게해 무섭다.

 

 

 

 

 

과거급제의 꿈을안고 한양을 오가던 영남의 선비들이 고향에다 좋은소식을 듣게한다는 문경(聞慶),그 고개와 희비를 같이해온

주흘산 정상은 운무로 아무것도 볼수가 없다. 먼저 정상에 도착한 과천의 산꾼들이 필자에게 고생했다는 인사와 함께 커피를 

권하면서 사방 운무로 조망이 없어 사진을 찍지 못해 매우 안타까워 한다. 

그 서운함이야 필자 또한 마찬가지 뒤따라온 대구의 산꾼들과 함께 주흘영봉으로 간다.

참고로 주흘영봉(1106m)이 주흘산(1075m)정상보다 더 높다.

 

 

 

능선을 따라 한참을 가다 뒤돌아보니 그렇게 감싸며 조망을 보여주지 않던 운무가 천천히 걷히고 약간의 조망이 보인다.

주흘영봉은 밋밋해 실망스럽고 서둘러 꽃밭서들을 향해 내려선다.

2-30분을 걸었을까 얼굴을 간간히 간지려주던 빗방울이 굵어지더니 장대비가 된다.

서둘러 카메라를 비닐에 싸 베낭에 넣고 고어 쟈켓을 걸친후 냅다 내달린다.

이런 빗줄기라면 필자가 조곡문(제2관문)에 닿기전 계곡물이 불어 계곡을 건너기가 매우 어려울거라는 판단에 두다리가 무거워도

내리 달려야 한다. 깊은 산골의 계곡물은 장대비엔 금방 불어난다는 사실은 산 메니아들은 모두 알고 있다.



 

 

필자의 몰골을 생각하니 불안감 속에서도 웃음이 난다.

장대비로 이 상태를 찍지 못하는것이 아쉽지만 오늘은 하산길을 서둘려야 한다.

첫번째 만나는 계곡으로 황톳물이 빠르게 흘러 들어가는걸 보니 이 장대비가 계속 내린다면 분명 문제는 있을것 같다.

과천의 산꾼들도 발걸음을 부지런히 떼어놓으며 몇번이고 하늘을 쳐다보며 원망의 눈빛을 보내고 있다.

  

 

마지막 계곡에 닿을 무렵 그렇게 극성스럽게 퍼붓던 폭우는 그치고 햇빛이 비친다.

제기랄 언제 비를 퍼부었냐는듯 금새 얼굴이 따갑다.

계곡에서 얼굴을 씻고 옷매무새를 다시 한후 평탄한 산길을 따라가니 영남대로 흙길을 걸어온 가족들과 연인들의 재잘거림이 들리

는 새재 2번째 관문인 조곡문이 조용히 서 있다.

다리(조곡교)를 건너 관문을 들어서자 한양으로 가는 호젓한 솔숲길에 안개가 바람보다 더 부드럽게 길위에 꽃으로 핀다.

   

 

 

조곡문

 

 

 

굽이마다 사연이 넘치는 옛길,

그 길에 필자 혼자 걸어본다.

무한경쟁시대 그 빠름에 부대끼는 우리들.

느림의 풍류는 물론 여유도 느끼지 못하는 참으로 불행한 시간속에서 과감히 이 길에 선 내가 행복하지 않는가? 

비에젖어 생쥐의 모습이지만 수백년 역사와 사연을 상상하며 한순간이지만 그 옛날 개나리 봇짐진 선비가 되어 고향을 향해간다.

 

 

한양 가던길

 

 

평소 잘도 흥얼대는 진도아리랑의 한소절에 영남의 대로 문경새재가 있다.

문경새재는 웬 고개인고

구비야 구비구비가 눈물이난다.

그리고 이 길을 넘나들던 사람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가락도 있다.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 홍두깨 방망이는 팔자도 좋아 / 큰 애기 손질(길)에 놀아난다. /

문경새재 넘어갈 제 / 구비야 눈물이 난다.



 교귀정, 신.구 경상감사가 업무를 인수 인계하던곳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였다고 해 "새재"

따라서 조령은 이를 한자어로 표현했다고 적었다.

영욕의 세월을 함께해온 새재와 이화령은 다시 중부 내륙고속의 이화령 터널이 생기면서 이화령은 대간길을 오르는 산객들이나

이용하는 고개로 전락 되었지만 새재는 드라마 촬영장 이후 과거길도 정비하여 주말이면 그래도 이 길을 체험할려는 사람들이 

무시로 찾아와 외롭지는 않다.  내려서면 경기 과천 백운산으로 발길을 옮겨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