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지리산을 오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길 위에서 민족의 영산 지리산 고봉들을 조망하고 어머니의
산자락에 터 잡은 산촌 사람들의 모습과 그 지역의 문화와 생활 그리고 잊혀가는 어릴적 고향의 풍광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이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흥분했고 필자 역시 뉴질랜드의 밀포드, 희말라야 트레킹을 연상하며 세계적인 트레킹 코스가 될 것
으로 믿어 의심치 않으며 들뜬 기분이 되어 첫 구간이라던 남원시 산내면에서 등구재를 넘어 금계까지 3번을 걸어갔다.
한번은 우중에 혼자서-또 한 번은 중학교 동문들과 마지막 한 번은 김해 아우와 ...
그 후 2번째 구간(금계-동강)을 처음 걷다가 해가 떨어져 소나무 쉼터 못미쳐 아래 이정표 갈림길에서 되돌아갔고 두 번째는
동강에서 구시락재를 지나 문하마을까지, 오늘(2009. 11. 1.) 은 오랫만에 김해 아우와 금계에서 동강까지 15.2km를 걷기 위해
동강에 차를 세우고 금계까지 군내버스로 이동했다.
벌통아래 의중마을
몇 주 전 칠선계곡을 갈 때 가을은 한창 이었으나 추성골엔 스산한 기운이 감돌아 이제 머잖아 지리산은 긴 침묵의 시간 속으로 빠져들어 길손들의 발걸음을 무겁게 할 것이다. 의중마을도 민박집들이 하나둘 생기면서 집들이 현대식으로 바뀐다. 입구 나무계단을 올라서자 작은 쉼터가 나오고 이내 낯익은 토종벌통이 먼저 반기고 의탄마을로 내려서자 느티나무의 낙엽이 길 위에 누워 불어오는 바람에 이리저리 쓸려가는 모습이 스산하다. 낯선 발소리에 놀란 누렁이는 하늘을 쳐다보며 어찌나 짖는지....
의탄마을 동구
당산 신목인 고목 느티나무는 아마 炭(숯)을 공급하던 기관 의탄소(炭)가 생기면서
있었을까? 의탄마을은 이 지방특산물인 숯을 중앙에 공급하던 하급기관이 있었던
곳으로 마을과 함께해 온 고목과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감을 메단 고목의 감나무가
어릴 적 고향 풍광을 생각나게 해 잠시 의자에 앉아 감흥에 젖는다.
어느 단체에서 온 길손들의 시끄러운 소리에 일어나 벽송사로 가는 고샅길로
접어든다. 언제부턴가 지리산길은 "지리산 둘레길"로 바뀌어져 있었다.
의탄마을과 고목 감나무.
벽송사로 가는 고샅길에도 낙엽은 진다.
느리게 정담을 나누며 벽송사의 말사격인 서암정사 아래 너른 터에 닿으니 단체로 온 둘레길 사람들이 먼저 도착해 휴식을 취하며 나름의 추억을 만들고 있다. 낙엽 밟히는 느낌마저도 흥분이 되는 이들에게 지리산이 주는 행복은 과연 얼마만큼일까?
하늘만큼일까? 땅만큼일까?
석굴 법당이 있는 서암정사로 가는 길
휴일이라 서암정사와 고찰 벽송사를 찾는 탐방객들이 산속 고요를 깨뜨리고
빛바랜 단풍이 마지막 혼신을 다해 빛을 뿜는 모습이 처절하다.
전란 때마다 온갖 풍상을 겪은 벽송사는 조선 중종 15년(1520년) 벽송 지엄대사가
창건하여 수많은 대사들이 참선했던 도량이다.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의 야전병원으로 쓰여 아군의 공격을 받아 불타기도 했다.
도량 입구 둘레길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
더 이상 송대마을로 걸어갈 수 없다며 푸념을 토한다.
어떤 이들은 아랫길로 내려서 가면서 이 길이 맞는지 모르겠다며 불만을 표한다.
무슨 둘레길이 통제되는 일련의 사건이 있냐며 분해한다.
필자는 분명 이 길을 걸어갔다.
무엇 때문에 이 길을 느닷없이 미개통 구간이라며 통제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공비루터길로 접어들었다.
함양군은 벽송사 - 송대마을 구간 지리산길을 하루빨리 개통하라. 미개통구간 이라니...
필자는 부아가 난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 길을 걸어가면서 벽송사의 스님들도 이 길에서 만나나무사이에 가로로 메단 대나무가 무슨 용도인지 물었더니 스님들의 체력단련을 위한 철봉대라고 대답해 줘 참으로 친환경적이라는 걸 느끼며 매달려 본 적이 있었다. 이 구간 개통한 지 얼마인가? 둘레길에 선 사람들이 이 구간의 농작물을 마구 남획하기 시작한다며 농장주인지 농업인이해당 단체와 기관에 강력하게 항의하여 이 구간을 미개통 구간으로 정하고 말았다. 필자는 함양군에 묻고 싶다. 함양군은 지리산 둘레길 개설을 위해 산림청으로부터 예산지원을 얼마만큼 받았나? 필자가 단걸음으로 달려가 확인하고 글을 쓰는 게 도리겠지만 오늘 유격훈련 보다 더 고된 길을 돌아와 글부터 먼저 쓴다. 만약 필자가 올린 내용이 틀리면 군 관계자는 댓글에 정확한 액수와 진행사항을 올려놓으면 수정할 것을 약정하면서 건의하고자 한다.
물론 이 길을 가면서 소중하게 키운 농작물을 훼손하는 인간들의 소행은 지탄받아도 백번 옳다.
가격을 따지자면 수십, 수백, 수천만 원의 고가는 아니지만 농업인의 분신과도 같은 농작물을 무차별 남획한 현장을 목도하면 아무리 선한 당사자도 화가 날 것이다. 아니 이 길에 농작물을 훼손하는 사람들은 1,000원짜리 호박도 못 사 먹을 정도의 극빈자인지... 첫 번째는 앞서간 남획꾼들의 소행을 강력히 규탄하고 앞으로 이 길에 설 사람들은 각별히 농작물 보호에 앞장서야 "개통"을 강력하게 부르짖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시기 바라면서 해당 기관인 함양군에 묻는다.
함양군은 산림청으로부터 약 110여 억 원의 둘레길 예산을 받은 걸로 필자는 들었다. 그렇다면 경향 각지의 둘레길 사람들을 이곳 함양군으로 운집하게 하려면 무엇보다 구간 개통이 원활해져 둘레길을 찾은 사람들이 아무런 안전사고도 없이 지리산과 그 자락에 터 잡고 사는 촌락 그리고 강을 가슴에 담고 가야한다. 그러나 유독 이 구간 중 벽송사-송대마을 구간은 통제(미개통구간) 지역으로 둘레길 사람들로 부터 외면받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진정 이 구간이 농작물 남획으로 통제구간이 되었다면 함양군은 농작물이 있는 구간은 철망을 쳐서 농작물의 안전을 지켜준 후 이를 즉시 개통하길 바란다. 사실 이 구간보다 다른 지역들이 농작물 재배면적이 훨씬 많고 사람들로부터 노출이 되어 있어도 아직 통제된 구간이 없다. 그러므로 타 지역보다 재배면적이 현저히 적은 이곳엔이곳엔 이곳 엔고액의 예산을 지출하지 않더라도 시설을 설치한다면 재배 농민도 개통을 스스럼없이 승낙할 것이다. 낙엽이 길을 덮어 희미하고 작년에 보았던 스님들의 철(죽) 봉대에 턱걸이 4개를 하고- 오늘 필자는 쓰러진 이정표에서 헤매다 산중 독가촌을 만나고 다시 능선으로 되돌아올라와 선녀굴로 향하다가 다시 막힌 산길 옆을 돌아 내려오다가 7-80도의 급경사비탈길에서 몇 번을 나뒹굴다 길도 없는 계곡 바위들을 타고 내려 겨우 송대마을에 도착해 통제구간의 어처구니없는 이유에 둘레길이 짜증길로 각인된다.
제주는 주민들의 협조와 관계기관 및 관계자들의 노고로 "올레길"이 연일 상종가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함양군의 둘레길은 둘레길을 그리는 사람들의 눈에서 영영 멀어지지는 않을까? 평생 지리산을 가슴에 품고 살 필자의 걱정이자 고민이다.
여기까지는 순탄하게 잘 걸었다. 이후 헤매고 헤매다 낙엽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도 찧고 군 복무 시 보안 순찰 때나 보았던 독가촌의 주인을 만나 지리산길을 물었더니 사치스러운 소리로 들리는 건 물론이고 그 길 자체를 몰라 되돌아 오르고... 그때 7-8명의 둘레길 사람들도 길을 헤매다 우리와 만나 또 헤어졌다가 나중에 다시 만나고... 넘어지고 미끄러지고 구불지고 엎어지고 그래도 길을 내면서 계곡을 힘겹게 내려와 송대마을 견불사를 만나 동강 방향을 묻고 시멘트길을 내려가면서 이제야 벽송사로 갈려는 사람들도 필자 일행을 보고 산길 가기를 포기하고 따라 내려선다.
저 길은 고행의 길
삶의 길
무한한 사랑의 길이다.
먹거리 배울 거리 입을 거리가 예전 저 길에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큰길에서 수철에서 동강을 지나 문하마을로 와 다시 백송사에서 금계로 내려오려는 둘레꾼들이
길 위에 서 있다. 오늘 둘레길은 영 개운치 않다.
김해아우도 분노의 목소리를 토해낸다. 젠장 둘레길도 막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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