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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사산행

연화산. 푸른솔향이 묻어나는 옥천사

2005년 새해 새날 연화산 옥천사로 가는 산객의 마음은 편하다.

갈때마다 한뭉치 그리움을 솟게하고 내 푸르디 푸른 시절로 데리고 가기 때문이리라...

이제는 까마득하게 먼 이야기지만 70년대 중반 청련암에서 수학하던 행시 사시 준비생들의 얼굴들도

이곳에 오면 모두가 있다. 철없던 중학시절 봄.가을 소풍지였던 관계로 연화산 옥천사는 진한 추억속에

죽마고우들의 함성도 함께한다. 고즈녁한 정말 무서울 정도로 적막한 산길위로 늘어진 낙락장송은 오랜

세월 풍상 겪어며 지내온 산사와 함께 중후한 모습으로 변함없이 사람들을 쉬게한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 했던가?  그 어렵던 시절에 만나 다들 뿔뿔히 흩어져 갔지만 낙방때마다

바가지술로 현실을 탓하면서도 누구하나 쉬 시류를 따라가지 못한자들의 손해는 두고두고 찌든

가난과 타락의 나락으로 곤두박질 쳤지만 그래도 모진 목숨 지탱하며 나름대로의 바른길을 걷게한것은

이승의 좋은인연들이 있어서가 아닐까?

억겹의 세월속에서도 변하지않는 자방루앞 전나무 2송이가 오늘도 산객을 맨 먼저 맞는다.

 

 

 

연화산 옥천사(玉泉寺)

의상대사가 당나라 지엄범사에게서 화엄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화엄을 강론하기 위해 676년(신라문무왕 16년)

에 창건한 고찰이다. 절의 이름은 대웅전 좌측에 끊임없이 솟아나는 달고 맛있는 샘(玉泉)이 있어 유래하였다.  

지금은 비롯 하동 쌍계사의 말사지만 당시에는 화엄종찰로 지정된 화엄 10대사찰중 하나였다.  

여러차례의 중창과정을 거친 고찰로 통일신라시대의 진경국사.고려시대 진각국사.등이 이 절에 기거하며

수학하였고 임진.정유재란때는 구국승병의 군영역할을 수행함으로서 호국사찰의 면면이 있다.

(이곳에서 임진란 당항포 격전지까지는 지척) 또한 옥천사는 종교적 기능뿐만 아니라 호국사찰인점에

국가로 부터 지원을 받아 1700년대는 큰 규모로 중창하였다. 1733년 (영조 9)부터 1842(헌종 8)까지

이 절엔 340여명의 군정이 기거할 정도로 12 건물과 12 물레방아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점에서 옥천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호국사찰이었던 셈이다. 20세기에 와서는 광복이후 교단정화와

불법중흥을 위해 헌신한 청담대종사가 1927년 첫 승려생활을 한곳으로 유명하다. 매년 음력 9월27일에는

이곳에서 이 절을 개창한 의상대사와 청담대종사의 열반제가 거행되고 있다. 옥천사는 보물 제495호인

임자명반자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인 대웅전(위 지붕중앙 부분엔 청기와 2점이 얹혀있음)자방루 향로

범종등의 문화재가 있고 백련암 청련암 연대암의 부속암자가 있다.

 

 

 

자방루는 지방유형문화재 53호로 정면7칸 측면 2칸의 주심포 건물로 거대한 성채처럼 절 외곽을 둘러치면서

중심영역인 대웅전을 가리고있다. 이런 유형은 산지에 큰뜰을 갖춘 (산지중정)것은 볼수가 있지만 자방루는

그 크기와 형태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누각의 아래에 기둥없이 석축을 쌓고 그 위에 받침돌을 세워 건물을 올린 기법이 특이하다.

또 기둥사이를 모두 두터운 문으로 막고 오직 앞마당과 전면만을 개방하여 큰 성채를 방불케한다.

자방루앞 넓은 마당은 승병들의 연병장역할을 했을것으로 추정됨.

 

정초라 그런지 매서운 바람이 살속으로 들어와 매우 추운데도 연인과 가족단위의 참배객이 제법 경내에 보인다.

자방루앞에 볼상사납게 세워둔(주차장이 있음에도) 짚차가 눈에 거슬리고 약수받는 물통에 차거운 얼음이

달려있어 한기를 느끼게하지만 고요해서 좋다.

예전 수백명이 먹고도 남을만한 싸리나무로 만든 공양통은 유물관으로 옮겨갔는지 보이지않고 대웅전

청기와와 옥샘(玉泉)그리고 각 사찰건물에 붙은 편액이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노쇠하여 세삼 고찰임을 암시한다.

풍경은 산바람에 은은히 소리를 내어 중생의 맘 씻어주고 사찰지붕위 멀리 연화산능선 낙락장송이 산객을

자꾸오라고 손짓해 경내에 오래 머물지도 못하고 발길을 산쪽으로 옮기려한다.

중학시절 소풍와 며칠밤 악몽을 꾸었던 그 무섭던 사천왕들 그땐 사실 대웅전과 부속건물의 불상도 무서워

필자는 똑바로 쳐다보지를 못한 기억이 생생하다.

나한전앞 상록수 한그루 꽃다운 나이로 이승을 하직한 중학시절 동무와 사진을 찍었던 곳이다.

네몫까지 살다 오라며 내손을 잡던 그 동무가 내곁을 떠나간지도 어언 30여년이 되어간다.
참 의리있던 아니 영원한 라이벌이자 언제나 내 편이 되어줄것 같았던 영리하던 고향벗.

그를 다시 생각하며 청련암 뒤편 가파른산길을 오르며 산객은 잠시 내 살아온 삶을 기억하며 그

또한 부질없어 살짝 도래질한다.

 

 

능선에 오르니 잔설이 걸음을 더디게한다. 오르고 내려가기를 두어차례 황새고개 돌탑에 닿아 돌맹이 2개를

탑에 올리고 잠시 휴식하지만 땀이 식어 무척춥다. 연인으로 보이는 젊은 등산객을 만나고 이들은 숨가쁘게

연화산 정상을 향해 뛸듯이 내려간다. 필자야 무엇이 급하랴 어차피 오늘은 이 산속에 있어야할걸...

비탈길을 천천히 내려가 양지바른 어느 이름모를 무덤가에 자리를 잡고 느긋하게 점심식사를
하고 일어섰다. 연화산 (526m)너른 자락에 안긴 옥천사가 시야에 들어오고 개천면소재지가 무척 평화롭게 보인다.

 

 

 

극락보궁으로 가는 임도는 지난번 내린눈이 녹지않아 빙판길로 매우 위험하다. 첩첩산중의 연화2구

(장전 일명 느지골 너지골)는 병마와 싸우는 중학동기가 사는 동네다.

지금은 도립공원속 산골마을로 제법 관광객을 위해 사슴목장과 분재실 그리고 토종닭 전문요리의 가든이

두어곳 있어 허기를 채우기에 좋다. 해는 빠르게 기울고 산객도 더 어둡고 춥기전 이 산길을 재촉하여

불황의 늪으로 또 가야한다.  왜 그곳에 가느냐고 푸른 연화산은 두손으로 발목을 잡지만 속세에 죄많은

산객이 불법(佛法)자리한 이곳에 기웃거리기가 죄스러워 잰걸음으로 내려와 다시 자방루 마당을 걸어

나오며 문득 오래전 어느 월간지 기자가 쓴 편집후기중 한귀절이 생각난다."탐심과 진심으로 치심하고

이 모든것들을 공심으로 놀아라 "

세상사람들이 다 이런 맘이라면 부처님은 분명 우리 마음에 정좌해 있지 않을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