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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동정맥 길

낙동정맥 5번째길 (피재에서 통리역 까지)

   비에젖어 울던 피재 기적소리도 목이 메이고...
         피재-작은피재-구봉산-930.8봉-송전탑-924봉-903봉-
         922봉-송전탑-우보산-느릅재-925봉-통리

 


고향집 마당 옆 단감나무에 감꽃이 필때쯤 천성산은 때아닌 함박눈이 내려 종주길 방해하였고 그 후

이런저런 이유등으로 휴식하다가 꼭 2개월만에 강원 태백 피재를 가기위해 새벽5시 종주대가 다시 모였다.

밤새 또 잠을 설치고 강한 빗줄기마져 갈길 막는가 했더니 다행히 10여분뒤 그쳐 하늘엔 별이 떠다닌다.

종주길이 삶에 위안을 받기위한 수단이 아니기에 사람들은 긴 산길 하염없이 가는 우릴 무모하다고

말들을 할련지 모르지만 맥을타는 맛에 빠져들면 사실 일반 산행보다 그 맛의 깊이는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즉 고통이 따르지만 완주후에 느끼는 감동과 희열을 어디에도 견줄수가 없다.

그리고 형제간 같은 돈독한 정은 산길 길게 갈수록 깊어만간다.

 

땀 흘린자만이 느끼는 강렬한 맥 체험 그 생생한 현장으로 우리 다시 가보자.

올 동계에 강원 지역의 적설량을 생각해 낙동강의 발원지인 황지연위 피재에서 맥을타고 내려가자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두끼의 식사 충분한 식수 그리고 낙지까지 냉동해 군장을 꾸려 출발지에 가보니 아직

아무도 없다.5분뒤 다 모여 태백을 향해 잠에서 깬 고속도로를 기분좋게 달려간다. 특공대가 따로없다.

모두들 눈에 비장함이 번득이고 2번의 맥 탐사로 쌓인 노련미가 자신들을 당차게 하는가보다.

안동 휴게소에서 아침 식사를 막 끝낸 태백산을 가는 진주 일출산악회원들을 만나 그 중 우리 산악회도

간간히 오시는분이  미역 냉국을 내줘 우리 일행도 아침 식사를 했다.

김해 아우가 가지고 온 안동 간고등어를 반찬하여...

 

 

일반적으로 낙동강의 발원지를 태백시내 한복판에 있는 황지연으로 알고있다.

여러 문헌에도 황지연을 낙동강의 발원지로 적었고 "낙동강 천삼백리 예서부터 시작되다"라는

표지석도 이곳에 있다. 허지만 낙동정맥을 선답한 사람들은 강한 의문을 제기한다.

황지보다 더 상류에 물줄기가 여러갈래 존재(우리 팀도 피재서 내려오다가 작은계곡도 확인)하기 때문이다.

기실 낙동강의 최초 발원지는 금대봉(1,418m)남쪽의 너덜샘 으로 여기서 출발한 물길은 흐르고 흘러가

낙동강 하구언 을숙도에서 너른 바다와 만나기까지 무려 506.17km를 달린다.

 

따라서 월간 산 별책 "호남.낙동종주"처럼 황지는 낙동의 발원연못.너덜샘은 "발원샘"으로 필자도 따라 적는다.

민초들중 가장 막장에서 매일 생과사를 넘나들며 검은 황금을 케며 이 나라 근대화와 경제발전에 초석이

되었던 광부들을 기억하는자도 요새 드물다. 그들이 흘린 피땀위에 오롯이 터 잡은 태백. 그러나 급변한

문명은 그들을 또 다른 생과사의 벼랑끝에 세우니 하나 둘 삶의 터를 떠나간 광산촌엔 적막의 무서움이

회오리처럼 돌아 나간다. 한때 걸죽한 육자배기와 탄묻은 육중한 손이 붉은 입술의 앙가슴을 무지하게

풀어헤쳐 무섭게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를 달랬을 주막촌도 문을 닫은지 오래인지 개소리 마져도 들리지 않는다. 

간간히 빗줄기가 필자를 긴장하게 하더니 드디어 작은피재에 도착했다. 1

0시45분 진주를 떠난지 5시간30여분이 걸렸다.(아침식사 및 초행길 길 찾는시간 포함)   

 

 

35번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 자북쪽이 매봉산줄기로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이 갈라지는 지점이다.

431번 포장도로 가기전 어느 블로그에서 본 "피재"입간판이 서 있고 그옆에 대간과 정맥팀 때문에 생긴건지

작은 구멍가게가 하나 있다. 대간 종주팀과 정맥 종주팀의 각양각색의 리본이 바람에 나부끼고 기념촬영을

한후 목장옆 철조망을 따라 피재 분기점에 당도했다.

(부산 건건산악회 제작 이정표)정맥팀들이 대부분 이곳에서 시작을 하지않고 작은피재에서 931봉쪽으로

진행하는 탓에 길도 희미해 출발부터 약50여분 길을 헤며다 겨우 대형 산불조심 표지판이 있는 작은피재에

내려서서 허기에 막걸리 한잔씩을 나눈후 종주길을 재촉한다.

 

 

 

매봉산 좌측 마루금에 풍력 바람개비가 돌고있다. 그 밑으로 35번국도가 지나가고 그로인해 대간과 정맥이

양분되어 정처없이 각자 갈길만 가는것이 씁스레하다. 구봉산을 오르기전 외국 영화에서나 볼수있는

푸른초원과 작은길이 너무 아름답게 펼쳐져있고 예전 목장인듯한 이곳에 지금은 고냉지 채소밭과 해바라기가

 넓게 식재되어 한여름을 준비한다.

우측으론 또 산 하나가 벌겋게 옷을 벗고 있고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낼듯 구름이 잔득 드리워져 있다.

간혹 천둥도 치고...

임도와 진달래지대를 지나 930.8봉에 올라 뒤를 돌아보니 산길 헤며던 매봉산 능선이 길게 늘어져 잘 보인다.

 

 

다시 임도와 작업도로를 따라가다가 좌측 산길로 접어들어 조금 진행하니 고압 송전탑이 나온다.

924봉을 땀 흘리며 오르는데 천둥소리는 먼길 온 산객 맘도 외면한체 쉴새없이 들려 앞서가는

대원들에게 비 오기전 점심식사를 할것을 권유해 고향 막걸리와 참이슬을 반주삼아 행복한 산 오찬을

마치고 일어서는데 무심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역시 아직도 못믿을건 울 나라 기상예보다. 분명 구름만 많을 것 이라고 해 비옷도 고어텍스 점퍼도

손에 들었다가 두고 와 낭패를 당할 지경이다.

마침 박영태 산행대장이 1회용 비닐 비옷을 준비해와 나에게 건넨다.

(산행대장은 카메라 때문에 준 것이라고는 하지만...)필자 외는 전부다 장대비를 맡고 걸음을 재촉한다.

소나무 숲길을 지나 작은 돌부처가 길가에 서 있어 의아함에 사방을 둘러보니

안동권씨와 정부인 삼척김씨의 합장무덤이다.

세도가 였음이 역력한데 무덤 중앙에 굵은 나무가 돋아나 있는걸보면 孫이 끊어진건지 아니면 있어도

이곳까지 오기가 불편해서 방치한것인지는 몰라도 남의 묘지지만 보기가 좋지않다.

비는 더 굵어지고 피재는 그렇게 장대비에 젖고있다.    

 

새내기 김순덕회원은 입회후 처음 따라나선 종주길에 장대비 까지 만났으니 심적인 부담과 열악한

산길로 지쳐가는것 같아 박영태.이일용 산행대장과 필자가 맨 후미에 서서 데리고 가자고 하자 이들은

자기들이 데리고 갈테니 한사코 필자를 걱정하지 말고 가란다.

다시 짐작되는 922봉을 오른후 송전탑을 만났다.  필자도 비옷을 입었어도 바지는 이미 물이 줄줄 흘러

신발안으로 빗물이 들어가 보행이 영 기분 나쁘다. 강한 바람에 모자가 벗겨질까봐 땅만 쳐다보고

거의 뛸듯이 비탈길 내려가자 제법 가까이 기적이 울린다.

 

 

비포장 도로가 보이더니 정각 같은게 서있어 내려서니 앞서간 대원들이 새로 지은 사당 처마에 서서

굵은비를 피하고 있다. 느릅재 유령산(楡嶺山)사당이다.

누가 재를 지내고 갔는지 총무가 술한잔 따라 놓기를 권해 황매산 농주 한잔을 권하고 내년 필자의 작은

소망하나 들어주기를 빌었다. 비 때문에 확인못한 봉우리가 우보산 즉 유령산 이었구나 후미 세사람도

내려와 휴식한후 맞은편에 버티고 선 925봉을 올려다보며 아마 저 봉우리만 넘어가면 통리에 도착할것

같다는 김해아우의 전화를 받고 일어선다. 느릅재를 소개하는 비석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있다.

 

 " 이곳 느릅령은 신라때 임금이 태백산천제를 올리기 위해 소를몰고 넘던 고개이며 조선시대는 태백산을

향해 망제를 올리던 곳으로 우보산이라고도 하였다. 먼 옛날 차도와 철도가 나기전 이 고갯길은 영동과

영서를 잇는 교통요충지로 험하고 높기에 맹호의 피해가 심해 고개밑에서 10여명씩 모여서 넘곤했다.

그 후 주민들이 산당을 짓고 영로의 무사안행과 주민의 편안과 풍년농사를 기원하게 된 것이 천년을 넘는다.

중간에는 관청에서 보조 봉제하다가 임진왜란등 난세에는 중단하므로 산당이 무너지는등 피해가 극심하던때

황지에 살고있는 효자가 소달장에 부친 제사 장보려 왔다가 그 날따라 늦어서 모군에 합류하지 못하고 혼자

넘다가 호랑이인 산령에서 흘려서 죽게 될 운명에 이르자 아버님 제사 봉행으로 살려달라고 애원하니 산령

왈 효성이 지극하니 나의 청을 들어주면 살려 주겠노라 하며 말하되 황소를 잡아 여기에 제사를 올려주면

무사하리라 하기에 약속하고 귀가하여 부친 제사후 황우를 제물로 음력 4월16일에 제사를 올리게 된 후부터는

태백과 삼척 주민들이 산당을 복원하고 매년 이 날 황우를 제물로 무사태평과 소망을 소원 봉제사

한것도 우금 수백년이다. 단기 4330년 음력 4월16일 유령제 봉사회" 

 

 

비 홀딱맞고 추위에 떨고있는 이 대장 (유령재)

 

강하게 퍼붓던 빗줄기도 멀리서 온 산객들 봐 주려는듯 빗줄기가 조금씩 약해진다.

능선 초입 복분자 군락을 만나 우중에도 신선도 100%인 강원도 복분자를 한옹큼씩 따서 입에넣고 봉우리에

올라서니 통리마을이 비로 엷게 젖어있다. 오늘도 이별이 있었는지 역을 빠져나가는 기차는 슬프디

슬픈 외마디 울음을 길게 깔고간다. 고냉지 채소밭을 돌아 큰길에 내려서니 김해아우가 저 만치서

차를 가지고 온다. 미리 시켜둔 백숙으로 낙동정맥 5번째 길을 자축하면서 무섭게 긴 다음 구간은 7월

3째주 토요일 밤에 올라와 새벽같이 타고 내려가기로 했다. 낙동의 발원지라 꼭 타고 싶다던

주명아우는 아마 알프스의 하이디를 만나고 있겠지...

 

 

우중에서도 복분자 밭에서 ...(???)

 

 

온 길 뒤돌아보니 모두가 하늘금에 닿아있다.

 

비에젓은 통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