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양기맥 종주 제9구간
백역재-마당재-금곡산-322봉-33번 국도-368.2봉-
의령군계-한산재-한실마을
도상거리 12.5km를 장장 12시간을 걸었으니...
2003. 7. 27. 오전6시 흐리다가 약간 갬
지루하던 장마도 물러간것 같다. 7시50분 백역재 밑에 도착했다. 백역재는 이제 3번째다.
돌무지에 차밑 덜컹거리면서도 부회장은 8구간 하산지점이고 9구간 시작점인 이곳에 우리를 내려놓고 돌아갔다.
참 이곳에 오기전 9구간 하산지점인 한산재 아래마을 한실로 가기전 지명을 몰라 쌍벽 면소재지에 도착하여
파출소로 시리가 달려 갔으나 파출소엔 문이 잠겨있고 현관에 부착된 오른쪽 벨을 눌러 보았으나 응답이 없어
돌아 나오다가 마을 어른을 만나 한실마을을 찾았으나 지도에 표기된 한산재는 모르고 아마 한실재로 알고 있는것 같았다.
그래도 낮선땅 낮선 이방인에게 마을뒤 재를 자세히 가르켜 주신분들 감사 드립니다.
8구간때 내려왔던 고개(고도 240)에 오르니(오전8시5분)풀향기가 상큼하다.
조그마한 봉우리를 직진하여 올라야 덜 고생 하였을텐데 왼쪽길을 따라가다가 길이막혀 353봉을 옆에서 올라갈려고
하니 경사가 7-80도라 코가 땅에 닿는다. 이미 땀은 온몸을 적셨고 다리가 아프다.
길만 잘 찾으면 오늘은 늦어도 오후4시에 도착된다는 시리의 말이 뇌리에 자리하기전 일어난 첫번째 낭패다.
심하게 경사져 미끄러운 비탈길을 신음소리 내며 올라가니(오전 8시45분) 숨이 턱에찬다.
초입부터 호되게 당해 숨을 고르기 위해 둘러보니 박성태님이 8구간 하산한 공암마을이 마치 사람의 손바닥 으로
감싼듯이 산이 감싸안고 있다. 저곳에 마을이 있다니...
공암마을
초반에 길 헤며 오늘 여차하면 일진이 안 좋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조심스럽게 종주기도 읽어보고
5분 간격으로 지도와 나침반.고도계를 보며 전진해 금곡산을 찾아가지만 야산에 여러갈래의 길은
소나무숲 짙어 조망을 통 할수없는 일행들을 괴롭히기에 충분하다. 박성태님의 리본을 발견하여
기분이 좋아지다가 1km도 못가 이내 그 길은 서너갈래로 갈라지니 인원이 적은 오늘은 산행대장
길찾기에 여느때보다 2-3배는 더 힘이든다. 시리도 부지런히 도상연구를 하지만 방향과 등고선만
보고 찾아가기란 밤중 항해하는 선박보다 더 어렵다. 통 앞이 보이지않자 산행대장은 나무위로
올라가 전방을 주시하지만 잘못온 길이다.
다시 왔던길 되돌아 봉우리로 오르니 발걸음은 무겁고 얼굴에 붙는 거미줄과 팔목과 바지에 엉겨붙어
상채기 내는 망게 가시덤불. 태풍으로 쓰러진 나무밑을 기면서 50여분 남짓하면 갈 금곡산을
1시간15분여만에 헤며다 찾았다. (10시) 삼각점이 있는 정상에서 북서쪽으로 덕유산이 조망된다고
적혀 있지만 흐린 날씨라 그런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물한모금에 캔 한모금으로 목을 적시고 차츰 무거워져 오는 베낭무게를 의식하며 어께끈을 당겨보지만
우리네 인생살이의 무게 만큼이나 한짐이다.
계속된 우기로 숲이 너무짙어 시야가 막혀 더욱 길찾기가 어렵다.
\왠지 오늘은 길을 너무많이 헤며는것 같다.
약 365봉을 넘고(10시30분) 10분간 휴식후 33번 국도를 향해간다.
종주기에 나와있는 넓은 무덤터를 찾아라는 특명을 내려 사방 찾아 보았으나 보이지 않는다.
앞서간 산행대장 "회장님"박성태씨 깃발 찾았어요"일행은 냅다 그곳으로 향한다.
자신이 제작한 리본은 거의가 노란바탕에 매직펜으로 "진양기맥종주 박성태"로 기입하여 산길 밝히고
간혹 구간에 분홍색 리본이 섞여있다. 비바람에 빛이 바래가지만 이분이 있었기에 오늘 새 리본을
다는 우리가 있다. 물론 이 길 쉽게 선택할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그것은 종주길 고생에 비해
사람들로 부터 대간이나 정맥보다 덜 인정 받을게 뻔해 영악한 요새 사람들이 이 길을 택하겠는가.
빛바랜 박성태님의 종주리본
허지만 이 길은 우리의 젖줄 남가람의 원류를 따라가는 생명의 길이요
진양인 진주인의 기상이 이어지는 맥이 아니던가.
거창한 국토 대장정도 좋지만 진주(진양)인은 진양기맥 종주의 대장정에 오르는것도 나라사랑 진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하지 않겠나. 자기 주장 한번도 굽히지않고 변명 늘어놓으며 끝까지 합리화 시키려는
요새 젊은애들 에게 고통이 무엇인지 타협과 정이 뭔가를 깨우칠 산 교육장이 되지않을까.
훗날 애비가 걸어온 이 길을 우리의 아이들이 따라 나선다면 오늘 이 고통은 감동이 된다.
박성태님의 리본을 따라 가지만 길은 또 여러 갈래로 나 있어 우리는 또 한참을 헤메다가 넓은 무덤을 만났고
334봉 봉우리 오른쪽길만 따라가다가 갑자기 산길이 밑으로 급격히 숙어져 지도를 보니 또 이 길이 아니란다.
김해아우와 졸자는 다시 내려온길 되돌아 올라가는데 김해아우가 우측으로 가는길을 찾았고 그 길을 따라가다
우회하니 2번째 넓은 무텀터를 지나니 숲에 가려져 완전히 보이지는 않지만 도리저수지의 물빛이 날씨 흐림에
허옇게 보인다. 차츰 마음도 지쳐오고 ...당초 예상과는 너무나 빗나가고 있다. 도로에서 차소리가 들리는지
귀를 세우고 내려갔다. 간간히 질주하는 차량소리가 들려 33번 국도가 가까이 있음을 느끼고 허기져 급한 마음에
서둘려 내려오다가 2번이나 엉덩방아를 찧었다. 우측으로 개짓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오고 박성태님이 적은
공장같은 건물은 공장이 아니라 축사였고 방학을 맞은 중.고등학생들이 마당 한가운데서 족구를 하고 있었다.
다시 되돌아 가고
쌍벽면과 대양면의 경계답게 스텐 깃봉에는 새마을기가 3-4개 바람에 날리고 대양면 청년회가 세운 대리석
표지석옆 마을공원 나무 그늘에서 서성배 팀장이 싸준 삼겹살에 소주를 반주삼아 점심식사를 하였다.
(13시10분)도로를 개설하기위한 절개지가 너무 가파르고 높아 도로를 건너 안전하게 봉우리로 동물들이
이동하기란 하늘에 별따기보다 어려울것 같다. 오전의 고생을 이야기하다 14시 도로건너 봉우리를 향해 잽싸게 뛰었다.
멈칫 하다간 평균시속 110-120km의 달리는 시한폭탄에 당할까봐 전력 질주했다.
도로를 건너 봉우리를 오르니 금방 식사후라 발걸음이 무쇠를 단것처럼 무겁다. 능선(14시10분)에 오르니
몇년전 산불로 소나무가 쓰러져 장애물이 되어 지나가기가 어렵다. 종주기엔 한산재 까지 별 무리없이 갔다고
적혀있어 우리도 쉽게 갈수 있으리라 생각했건만 그것은 희망사항
일뿐 현실은 인내를 시험하는것 같이 참담하다. 다람쥐 쳇바퀴 돈다고 하던가 점심식사후 30여분 지나자
우리는 다시 미로 찾기에 나섰다. 박성태님의 리본을 찾아야하고 그것마져 없으면 앞서간 사람들의 흔적을
찾아야 가는길을 가늠하는것이다.
또 다시 보물찾기가 시작 되었다.리본 하나를 찾았고 무려 2시간여만에 320봉에 도착했다.(17시05분) 큰일이다.
심적으로 상당히 부담을 갖고 있었는지 급격히 체력이 떨어지고 약간의 탈수현상이 일어난다.
서너발짝 가다가 멈춰서는 시리. 오늘은 생각보다 독도가 어렵나보다. 기맥은 독도만 가지고는 길 찾기는 어렵다.
김해아우는 이 시각에 박성태님은 한실로 하산하여 시멘트 싣고 왔다가는 트럭을 얻어타고 간 시간이라며 긴장한다.
잘 정리된(조성된)너른 무덤을 찾아야 한다며 종주기를 들고 김해아우는 걱정된 표정이다.
졸자는 어찌된 영문인지 한발자욱도 떼어놓기가 힘들고 이대로 주저앉고 싶다.
"욕심이였어 .새파란 젊은 사람도 힘들어 가지않는 이 길을 무엇 때문에 나서서 여러사람 고생시키는지.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368봉(17시15분)을 지나고 두어번 더 길 헤며다가 거의 파김치가 되어서야
중추부사의 묘(너른 잘 조성된 묘)를 찾았다. (18시05분) 묘비는 오랜 세월의 풍상에 글씨는 알아볼수
없을 정도로 낚아있고 단지 중추부사의 글씨만 선명하다. 한때 한시절을 풍미했던 고관대작. 잡초는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고 산객 발걸음 너무 무겁다. 한산재로 가야한다. 한산재로
오늘은 진종일 산길찾아 헤메었다고 표현 해야한다. 종주기 처럼 남쪽으로 진행하다가 동쪽으로 가는
능선에는 묘가 줄줄이 있었고 그 능선엔 다른 여러 능선과 마찬가지로 산돼지가 지나간 자리엔 풀이며
모두가 초토화 되어 있었다. 그러나 우기로 녹음방초 7월말 야산의 길찾기란 소학교 보물찾기보다 더 어렵다.
(허긴 소풍때 보물을 단한번도 찾은적이 없음) 묘지를 지나 넘어진 소나무들 가지사이로 기다가 넘다가를
반복하며 터덜터덜 가는데 우리 산행대장은 소나무를 칭칭감고 있는 칡넝쿨 짤라주기에 바쁘다.
힘이 많이드니 그냥 가자고해도 이대로 두면 소나무 고사 한다며 낫질을 한다. 펑퍼짐한 소나무 숲길이
나와야 하는데 봉하나를 우회하면서 이 길을 놓쳤다. 비탈길을 앞서 내려간 산행대장 저수지가 보인단다.
직감으로 아니다 라고 느끼고 김해아우와 다시 올라 우회로 돌아가니 그때서야 펑퍼짐한 소나무 숲길이
이어지고 중추부사 묘를 찾은것이다.
산중에 어둠이 내리면 긴장한다. 특히 졸자는 왼쪽 무릅과 발목에 인대가 아직 완치라고 볼수 없기에
어두워져 삐걱이라도 한다면 이제 기맥종주는 끝이다. 김해아우도 걱정이 되는가보다. 망할넘의 한산재는
가도가도 보이지않고 개짖는 소리만 들린다. 한참을 또 헤며다가 돌복숭아 나무 볼품없이 서있고 절구통
허리처럼 못생긴 한산재를 찾았다.(19시10분) 리본 하나를 달고 우측으로 내려 서는데 다리에 힘이라고는 없다.
중추부사 묘지
관절이 아려오고 지쳐서인지 왠지 금방이라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것 같다. 눈앞 바로 아래에 있는
한실마을로 가는길이 너무도 멀다. 20여분을 걸어 조용한 마을로 내려서니 개들은 낮선 산객을 보고
짖어대고 가로등엔 벌써 희미한 불이 켜진다. 하루에 지친 산골 마을을 어둠은 조용히 보듬고
우리는 한산재를 올려다보며 10구간을 예상한다.
저기 아침부터 저곳 오르기 장난이 아닐낀데..
도상거리 12.5km 남짓한 길을 헤며 12시간이 소요 되었다면 믿어 실련지...
한실마을이 점차 어둠에 쌓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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