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수 굽어보는 관악산.
올해도 가을은 어김없이 휘돌다 갔을까?
일천만 하고도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수도 서울.
그 해도 한강수는 희뿌연 개스를 뚫고 그래도 기운차게 너른 바다 서해로 흘러가고 있었다.
관악산의 기운이 솟은걸까? 한강 이남과 과천벌은 아파트 숲을 이루고 있다.
허지만 그날 관악산을 비좁게 오르는 특별 시민중에는 아직도 내집을 가지지 못한자 얼마일까?
설움의 타향살이 비비고 기댈곳도 없는 나약한 빈자(貧者)는 산중 막걸리 한사발에 시름을 달래보지만 이내 눈뜨고 내려다보면 서슬퍼런 현실이 버티고 있다. 그래도 사람들은 이곳을 쉬이 떠나지 못함은 무슨 까닭일까? 신림동의 수십억대의 주상 복합건물이 관악산을 찾아온 천리길 산꾼들을 조롱하듯 때깔좋게 서 있다. 조선을 연 태조는 왜 이곳에 도읍을 지어 한강을 사이에 두고 여의도 한복판 돔 지붕집 양반들은 하루도 잠잠한 날도 없이 연신 그 해는 억.억.억 소리를 내고 있었고 인왕산밑은 안개를 짙게 피워 용트림 하듯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왕관바위
관악산! 영등포구에서 분구된 관악구의 신림동과 경기 안양.과천의 경계에 기운차게 솟아오른 632m(어떤곳은 629m로 표기되어 있음.정확도는 졸자도 모름)의 바위산이다. 북한산.남한산과 함께 서울분지를 이중으로 둘러싼 자연의 방벽으로 옛서울의 요새지다. 주봉은 연주대이며 산정의 "영주대"는 세조가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화기(火氣)의 산세를 가졌다는 관악산을 2003. 10. 19. 진주에서 오전7시에 출발하여 사당역에서 내려 11시경 올랐다. 서울특별시민들과 어깨 부딪혀가며 ...
관악산의 유래를 풍수지리학에 심취되어 수십년간 공부하여 책까지 내었다는 시청 이모 과장으로 부터 대충 들었지만 구체적인 내용이 조금 미진한것 같아 문헌에 나온 내용을 토대로 적을까 한다.
한양천도에 관하여 무학대사는 관악산을 정남쪽에 두고 왕궁을 지으면 그 화성(火性)에 눌려 내우외환이 그치지 않을것이다 하였으나 개국공신 정도전은 한강이 가로막고 있어 火氣가 오지 못한다고 주장 하였다 한다.
태종은 정도전의 손을 들어 주었고 그후 1,2차 왕자의 난, 단종/사육신의 죽음등 조선의 역사는 피바람이 잦았으며 경복궁도 자주 화재를 당한다. 흥선 대원군은 경복궁을 재건할 때 돌로 해태를 만들어 광화문 앞 양쪽에 배치하였고 관악산에 우물을 파서 안에 구리로 만든 龍을 넣음으로서 火氣를 방지 하였다고 전해와 이와같이 관악산은 풍수지리설에 의해 화덕을 가진 「불기운의 산」으로 전해져 왔다. 참고로 대한민국에는 이제 명당자리가 한곳도 없다는 이모 과장의 말 명심하시고 사기성 짙은 지관들 꼬임에 절대 속지말것을 졸자도 당부 드리고 싶다.
관악산은 천년의 세월을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은체 도읍을 지키며 탐관오리들의 작태를 보고도 눈감고 있었을까? 유독 가지지 못한자들만
소리쳐 오게하여 팔봉 벼랑길을 걷게하여 고행을 시험 하는건지 월아산 산책로 처럼 이어지던 산행길은 연주대가 바라보이는 능선부터 땀을
조금 솟게한다. 혹자는 관악산을 태산은 아니나 준령과 기암이 중첩하여 장엄하다고 했다. 기암은 제대로 품세를 갖추었고 농익은 여인의
엉덩이 바위가 있는가 하면 물개와 다람쥐 형상등 공해로 찌든 서울의 산 답지않게 바위와 산자락에 천천히 가을색으로 채색한다. 우리 사는 천리길
남쪽은 잦은비로 단풍이 썩어가지만 관악산은 거센 숨 내쉬어며 공해를 견뎌 형형색깔의 추색(秋色)을 연출하여 하루도 인적 끊이지 않게하여 외롭지
않다. 산도 외로우면 슬픈 울음 골을 돌지않던가...
관악산은 높은산은 아니나 산이 지녀야할 덕목을 다 갖춘산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만큼 벼랑길 스릴과 긴 능선이 먼길온 산꾼들 흥미롭게 한다. 고향 후배가 권하는 산중에서 팔고있는 서울 막걸리 한사발 기분좋게 마시고 연주대 옆 점심식사를 위해 일어섰다. 그래도 군데군데 이런 간이 주모들이 있어 산꾼들 신이 나겠지 진주에서 온 산꾼들이라며 모두들 친절 할려고한다. 기상 레이더를 지키는 우리 아들 또래의 초병들이 안스러워 식사때 뭘좀 줄려고해도 초병 본연의 임무를 다해야 한다는 정중한 거절에 든든함을 느꼈다. 즐거운 점심식사후 우리는 팔봉을 향해 일어섰다 한참을 내려와 뒤돌아보니 연주암을 받치고 있는 기암이 마치 돌기둥처럼 보인다. 저곳에 당시 기우제를 지내려 오던 왕들은 가마를 타고 올랐을까? 그랬다면 가마꾼들은 아마 초주검이 되었겠지 예나 지금이나 늘 불쌍한것은 힘없는 백성이 아닐련지 ?
연주대.
팔봉.
여덟개의 봉우리가 적당한 암봉과 솔숲을 거느리고 마치 용트림하는 자세다.
긴 능선이다. 이 곳엔 무상의 바위들이 사람들을 노려본다. 팔봉산길에서 만난 관악산 예찬론자는 숨겨진 바위 비경을 베낭에서 꺼내 보여준다. 10여장의 사진속엔 왕관바위를 비롯해 남.녀 거시기바위.각종 동물바위등을 보여준다. "돌의 미(美)는 영원한 생명의 미"라고 하였던가? 관악산 벼랑길은 위험속 안전한 산행길이다. 암봉에서 만난 서울의 산꾼 며칠전 중산리를 다녀 왔다는 그가 자신의 카메라에 우리를 담고는 언제 진주에 내려오면 사진을 갖다 준단다. (아직까지 사진은 오지 않았음) 관악산의 하늘도 에머랄드 가을하늘이다. 목놓아 부르는 그리움의 하늘이다. 소일없이 산속 헤며는 백수의 절규가 하늘에 닿지 못하고 관악이 안는다. 피멍든 가슴은 산줄기마다 붉은천을 토해내고 일상으로 가지 않을려는 군상들이 바위를 끌어안고 몸부림친다.
관악산은 없는자들의 피난처다.
아침부터 가난에 목청 높이는 안사람의 긴 잔소리에 허겁지겁 올라온 명퇴자의 도피처다.
천년세월 도읍의 발자취를 상기하며 긴 계곡길 내려오니 낮선 이국에나 있을법한 집시들의 연주회가 관악산 밑에 있었다. 낚은 트럼펫과
아코디온에서 흘러나오는 귀에 익은 한가락 유행가를 뒤로하고 서울대 켐퍼스옆을 하산했다. 자동차의 굉음 분주한 노점상의 빠른 손놀림 다시 우리는
일상에 서 있다. 그러나 2003년 관악산은 솜사탕처럼 아주 달콤하게 가을행복을 인간들에게 나눠 주고 있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올해도
어김없이 관악산은 가을을 보듬고 있었을 것 이다.
집시들의 연주.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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