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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며 생각하며

따뜻한 초가를 그리며

          따뜻했던 초가가 문득 그립다.

 

 

우리 생활의 주무대인 집은 뭐라해도 따뜻하고 평화로워야 한다.

예전 내가 태어나 유년의 시절을 보내던 시골 대부분의 집들은 흙벽(황토.진흙)과 볏짚으로 지붕을 덮은 초가였다. 나락(벼)이삭을 털어낸 볏짚을 햇볕에 말리고 노랗게 윤기가 나는 볏짚 밑둥부분의 피복(껍질)을 손가락으로 걷어낸후 아버지와 형들은 몇날 몇일을 새벽에 일어나 촘촘히 날개(나래)장을 엮어 마당 귀퉁이에 집채만 하게 쌓아두고 이웃들과 품앗이로 지붕을 덮을 준비를 한다.

날개장을 엮는것도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것은 용마루를 엮는것이다.

 

용마루는 지붕의 중심에 위치해  비가 새는것을 방지할뿐 아니라 지붕 전체의 모양을 나타내므로 아주 섬세하게 짜야한다. 따라서 동리에선 그 용마루의 몫은 언제나 울 아버님 이셨다. 1년만에 퇴색한 지붕의 짚을 벗겨내고 새 짚을 씌우는날엔 집안의 잔치날과 진배없다. 하얀 쌀밥에 큼직큼직하게 무우를 썰어넣은 갈치국은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먹어본 세상 어느 성찬도 이것과는 비교가 될수가 없다. 그기다가 새참으로 나오는 무우채에 가오리 무침의 상큼한 맛 그리고 밤알처럼 파삭파삭한 삶은 고구마 위에 김치를 걸쳐 먹는맛을 요즘 우리 아이들이 좋아하는 햄버거에 비할까?

아무튼 가을걷이가 끝나고 초가지붕들이 새옷을 갈아입는 그날은 행복한 잔치날이였다.

방3개에 9식구가 불편없이 살았던 고향집 초가지붕을 이는 그날이 말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난 요즘은 어떤가?

딸랑 3식구 아니면 4식구에 48평도 비좁다고 기를쓰며 집 평수 널리기에 평생을 건다.

어느새 집은 부의 상징이 되었으며 태어나 집 하나 장만하기 위해 세상을 산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가집은 여러가지로 불편한점이 많았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야 했고 밤에는 10촉도 되지않는 호롱불로 어머니는 아이들의 헤어진 옷과 양말을 기워야 했으며 우리는 책을 읽었다.

그러나 그때는 가난했지만 이웃간에 변치않는 풋풋한 정이 있었고 형제간에는 더없이 우애가 있었으며 아궁이에 군불만 지피면 황토방 같은 따뜻한 아랫목이 엄동설한을 비켜갔다.여름엔 태양 열을 지붕의 짚과 흙벽이 차단해 참 시원했던것 같다. 이제 생각해보니 그 모든것이 지금 난리를 치고 있는 웰빙은 바로 흙벽이 있는 초가집이 아닐까? 그 옛날 이 맘때면 빈 들판인 기산들엔 보자기를 하나씩 앞에찬 아낙들의 이삭줍기는 세계적인 명화인 밀레의 만종과 이삭줍기가 어디 이것을 따라 갈수 있었을까?

어머니 품속처럼 따뜻하던 초가집 지붕덮는 풍경이 오늘 아침 무척 그립다. 이제는 민속촌에서나 간간히 볼수있는 지붕덮는 풍광도 또 한 세대가 흘러가면 영영 사라지지 않을까? 

처마쪽 끄트머리 반으로 가른 대나무에 날줄과 씨줄로 고정시켜 "사하라" 태풍도 거뜬히 견뎌내던

초가집에 9식구 살던 그 시절로 오늘 문득 가고 싶은것은 왜 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