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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마여행

천년고도 신라 불교문화의 보고 경주 남산을 찾아서


 
[골마다 佛心 가득한 고도 경주(서라벌)南山]

신라 불교문화의 보고 남산을 찾아서
2006. 2. 11. 날씨 좋음

 

신라 천년의 역사는 남산(금오산)에서 시작되어 남산에서 막을 내린다.

시조 박혁거세의 출생지인 나정이 그렇고 흥망성쇠의 상징인 포석정의 질펀한 유희도 이곳 남산이니 건국과 패망이 다 여기에 모여 있다.

 

남산은 천년 신라 불교문화의 성지로 국토불의 요람으로 도처에 문화유적이 산재해 테마여행과 문화재 체험 산행지로 알려지면서 연중 산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또한 남산은 무던히 사무친 그리움들이 사랑으로 결실을 맺는 연리지가 발견되어 새로운 사랑의 터로도 자리를 잡아 기슭 삼릉을 비롯한 경애왕릉 포석정을 중심으로 아름다운 적송길엔 연인들의 밀어가 솔향으로 번져 낙락장송마다 길다란 사랑의 이야기를 가지마다에 걸어놓고 간다. 삼릉 주변의 솔숲은 곧 신라 천년의 향기며 선비의 기개다. 2006. 2. 11. 밤길달려 다시 남산을 찾아갔다.

 

 

남산을 오르는길은 삼릉 솔숲으로 부터 시작한다.

푸른 하늘을 향해 한껏 솟아오르고 세상을 향해 내 뻗은 솔가지는 기품과 용기 그리고 곧은 정신의 상징으로 한겨울에도 특유의 푸른빛을 띄우며 산을 오르는 사람들 코끝에 분가루 같은 솔향을 사정없이 들이민다.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계곡물덕에 냉골이라고도 불리는 삼릉초입엔 불심을 담으려는 범부들의 작은 돌탑을 제일먼저 만나고 이어 계곡옆 목이 잘린 삼릉곡 석조여래좌상을 만난후 좌측으로 풍만한 얼굴에 왼손에 정병을 들고 남산 정상을 바라보고 선 마애관음보살상을 만난다.

 

 

삼릉. 앞릉부터 54대 경명왕릉. 가운데가 53대 신덕왕릉. 그리고 마지막이 제8대 아달라왕릉

 

 

                                                        삼릉곡 석조여래좌상

 


남산 산행은 조급함이 따라서는 절대 안된다.

우족으로 가야한다. 그것도 황우의 걸음으로 생각하고 느끼며 산길을 가야한다.

과욕도 버려야한다. 불상이 많다고해 모든걸 빌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세상 모든 번뇌도 이곳에서는 헌신짝 던지듯 벗어 던져야 한다.

비늘처럼 차곡쌓인 고뇌에 찬 일상도 남산에 서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려 놓아야 한다.

능선에 섰다. 작지만 산 전체에 천년의 세월만큼이나 한(恨)과 아쉬움이 점철된 혼들이 바위로 뭉쳐져 있다. 군왕의 판단으로 터 잡은 너른 들판은 백성을 먹이고 입히는 일에 신경을 쓰므로 어쩌면 현재의 정치보다 더 위정자들의 선견이 확실한것을 느낀다. 소복히 쌓여 녹은 잔설 얼어붙은 능선길을 조심하며 드디어 김시습의 금오신화의 진원지인 금오산 정상에 닿았다.

파란 하늘이 열려 개국을 또 보는것 같다.

 

 

 

 

△ 삼릉계곡 마에관음보살상

 

 

△ ▽ 삼릉계곡 선각육존불. 음각불상 머리위에 서있는 사람들이 우스워 보였다.(??????)

 

 

 

△ 삼릉계 석불좌상. 우측  볼의 멍이 인상적임

 

 

△ 선각여래좌상. 몸체는 선각으로 나타냈는데 얼굴부분에 돋을 새김을 했다.

 

 

 

△ 마애석가여래좌상. 좌불로는 가장 큰 불상  머리부분에 돋을 새긴게 특징

 

 

△ 금오산 정상

군데군데 일행들이 모여 식사를 한다.

강한 바람이 한기를 느끼게 해 옷깃을 여미며 옥수골로 내려선다. 그리움에 목타 소울음처럼 울던 필자도 남산 때문에 최고의 날을 맞았다.

천년의 역사가 이곳에서 시작 되었으니 100년도 안되는 삶 또한 여기서 새로 써야겠다.

고도(古都)의 특징이 현대와 과거가 공존하며 사이좋게 살아가듯 다시 시작함은 새로움이고 그래서 설레임과 기대 그리고 희망이 분명 있을것이다. 멀리 내다볼수 있는 기회 그것을 오늘 이곳에서 느끼며 가파른 비탈길 조심하며 내려서다가 결국 넘어졌다.

 

 

 

옥수골로 내려서 삼릉을 향해 걸어간다.

보고 또 보아도 신라와 함께한 낙락장송은 흐른 세월의 두께 만큼이나 그 몸빛 또한 선명해 발걸음을 멎게하고 발길 뜸한 경애왕릉에 도착하니 연리지를 닮은 노송이 인상적이다. 얼마나 많은날을 사무치게 그리워 한건지 두그루가 한몸이 되어있다. 과히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아닐련지... 

몇년전 남산 산행을 마치고 들렸던 칼국수집에 들려보니 홍두께로 밀가루 반죽을 동그랗게 펴던 할머니는 보이시지 않는다. 칼국수에 동동주를 마시고 일어나 경애왕 재위 4년에 견훤의 군사들에게 습격을 받아 죽임을 당한 포석정을 찿았다. 흐르는 물위에 술잔을 띄워 술잔이 자기앞에 올때 시한수를 읊었던 놀이 유상곡수연의 포석정. 왕실의 별궁으로 왕들이 연회를 베풀던곳 화강석으로 만든 곡수구의 길이는 약 22미터 49대 헌강왕이 신하들과 어울려 여흥을 즐길때 남산의 신이 왕 앞에서 춤을추자

왕도 따라 춤을 추게되어 이로부터 "어무산신무"라는 신라의 춤이 만들어졌다고 문헌은 전한다. 풍류를 즐길줄 알았겠지만 백성들을 혹 잊은적은 없었는지 전복같이 생긴 석조 구조물에 예전처럼 물이 흐르면 운치는 더 하겠는데 아마 빠른 훼손을 염려하여 물을 채우지 않는가보다. 그곳에 물흐르게 할 방법은 누워서 떡먹는것 보다 더 쉬울텐데 말이다.

입초처럼 선 두그루의 고목이 겨울 포석정을 지키고 있다.

 

 

 

경애왕릉

 

 

포석정

 

 

포석정.

 

겨울 임해전지(안압지)는 별궁답게 고요가 흐른다.

잔잔한 수면위로 찬란한 천년문화를 꽃피운 신라가 물안개 처럼 피어 올라 묵상에 잠기게 한다.

이 땅에 터 잡아 천년을 산 나라. 그리고 뭐라해도 삼국을 통합한 여력이 있었던 나라가 아니던가?

말기 고려 왕건을 위해 연회를 베푼 비운의 역사도 간직하고 있지만 신라는 천년의 세월동안 문화와 예술 그리고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할 첨단과학의 상징인 첨성대는 우주를 향한 원대한 꿈도 여기엔 있었다.  비원같은 오솔길을 돌아 가느다란 바람에 사각거리는 대소리도 듣고 의연한 솔숲을 지나 나오면서 문득 경주시에 제안 하나를 하고싶다. 유적지를 찾아 갈때마다 주차비와 관람료를 번번히 징수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많은이들이 짜증을 내므로 코스별 관광카드 발급을 한다면 관광객이 선별하여 카드를 구입하여 관람할수 있게 한다면 지자체와 관광객 모두에게 득이 되지않을까? 필자도 이날 가는곳마다 지갑을 꺼내는 번거로움을 당한후의 생각이다.

실례로 첨성대-박물관-안압지-분황사지 금 10,000원 등 

 

 

임해전지(안압지)

 

감은사지

 

몇년전 찾아 갈때마다 적막감이 더 아늑함으로 다가오던 감은사지터.

부왕 문무왕의 뜻을 기리기위해 신문왕이 건립했다는 감은사 처음본 그때도 석탑의 훼손이 심각해 염려가 되었는데 찾아간날 좌측(사진으로는 뒷편) 석탑은 대수술을 받고 있었다. 회색빛 날씨 때문인지 참으로 을씨년스러워 채5분도 서 있을수 없어 문무왕이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겠다며 수중에 묻힐것을 유언해 세계 최초의 수중왕릉이 된 감포 밑 해변으로 갔다.

 

 

감은사지

 

 

문무대왕릉

 

대왕은 죽어 또 천년이 되어도 외롭지 않았다.

아름다운 겨울 철새들의 군무가 왕을 위해 해질때 까지 이어지고 군중들의 발길 끊이지 않는다.

간혹 하얀 포말되어 손등 간지르는 파도에 놀라 하늘을 비상하는 철새의 유희는 발레리나의 가는

다리보다 더 날렵하게 수면을 박차고 하얀 날개짓으로 백조의 바다를 연기한다.

청중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을려고 연신 카메라 셔트를 누르며 해지는줄도 모른다.

산객이 나그네가 되는 경주. 나그네가 산객이 되어 타임머신을 타고 화랑의 대열에 설수있는 경주.

필자는 경주에 서면 가슴이 벅차다.

수학여행 떠나는 아이들 처럼......

 

 

일상을 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