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도 시시각각 변한다.
똑같은 장소에서 사진을 찍는 사진작가들의 그림이 제 각각이듯 산은 보는이마다 그 느낌이
다르고 계절마다 그 풍광이 달라 신비롭다.
산은 뛰어난 작가의 작품 같아서 산을 그리는 사람들은 그 깊이에 빠져 늘 허우적거린다.
봄볕이 내려앉은 산자락에 봄은 누군가의 말처럼 고양이 걸음으로 오는가?
지심도엔 홍매가 이미 서럽게 지고 지난 일요일 통영의 달아공원 언덕배기에도 봄비를 측은하게
맞고 있던 매화는 만개 하고 있었다.
이제 꽃들은 앞다투어 남도의 산야에 꽃망울을 터뜨리다 휘파람을 불며 준령을 넘어 북으로
북으로 내달릴 것 이다. 희망이라는 메세지를 담고서...
오늘 봄맞이 산행지는 경남 함양골과 전북 남원 아영면에 소재한 오봉산이다.
5개의 암봉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이 산의 이름은 항상 서리가 내린다고 하여 "서리산"혹은 霜山(상산)
이라고 불러진다. 지리산줄기의 고봉들에 가려 그 명성도 덜 알려져 있지만 주릉인 천령봉 종주시엔
5-6시간의 산행 시간이 소요되니 고봉의 산은 아니지만 옹골찬 산릉임에 틀림이 없다.
겨우내 게으름을 피우던 사람들을 다시 산길로 부를 실루엣 같은 봄볕이 산자락에 내려 앉고 있다.
오봉산에 대한 자료가 부족해 쉽게 오를수 있는길을 놓친 필자는 어떤이의 안내글에 남원으로 가는
24번 국도를 따라 가다 인월4km가 적힌 이정표에서 우측 묘지가 보이는곳으로 진입하라는 글귀만
보고 차량 1대를 세울수 있는 표지판 아래 공터에 차를 세운후 이정표를 향하다 우측 희미한 산길로
접어드니 근래 사람들의 래왕이 없었는지 가시덤불이 성가시게 엉켜있다.
서울 모 산악회 리본만 없었더라면 아마 산길이 아닌줄 알고 되돌아 설 법한 길에 필자도 다음 사람
들을 위해 리본 하나를 부착하고 잡목들을 헤집고 나가 뚜렷한 길위에 섰다.
오늘 이 산길에도 어김없이 길동무는 없다.
해질녁 산사 예불이 끝난뒤의 고요함이 솔숲길로 엄습해 솔 사이의 긴 공간이 해맑게 필자의 몸을
감싸 속살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개울을 건너가듯 청량하다.
그러나 잠시후 이 망할넘의 오름길은 숨을 턱에 까지 차게 하고 연신 이마에 땀을 훔쳐내게해
여름철 이 산길을 올라 능선길에 닿을려면 땀깨나 쏟아 낼것같다.
이 산길은 예전 등산로가 없었던 싯점에 오봉산을 찾았던 사람들이 이용한 길이였나보다.
필자가 이정표에서 조금만 더 고갯마루를 올라 갔더라면 새로 조성하는 위락시설 옆으로 난
임도를 따라 편안하게 올수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오봉산 개발 프로젝트인지 벌목과 임도 조성이 개운치는 않다.
오름은 계속되고 나뭇사이로 오봉산의 봉우리들이 그 자태를 감추지 않고 드러내고 있다.
초입부터 시작된 오름길로 쉽게 지쳐 바위에 걸터 앉아 휴식을 취하는데 능선에서
처음으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지인이 보내준 해풍 맞은 거제 고로쇠물로 목을 추이고 다시 된비알길을 향해 오른다.
이 산도 봄엔 진달래가 능선마다 분홍빛 물을 들여 서리맞은 봉우리들을 감싸안아
만리 변방에서 불어오는 춘풍에 붉은 기운을 하늘로 솟구치게 할 것 같다.
숨통이 탁 트이는 능선에 서니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훈훈하다.
휴식하며 들었던 목소리들은 이미 오봉산 정상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며 일성들을 지르고 있다.
완전한 모습을 드러낸 오봉산은 암봉의 봉우리만 보면 영락없는 설악의 한봉우리를 닮았다.
그러나 소담한 저 산 암벽엔 알파인들이 개척해낸 암릉길이 있으나 일반 산객들은 어김없이
원거리에서 암릉의 자태만 보고 가야하니 섭섭하다.
능선 이정표에서 정상까지는 탁 트인 조망이 답답했던 마음을 활짝 열어준다.
지리산의 준령들이 아득하고 어둠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다랭이 전답의 모습에서 문득 "워낭소리"에
나온 촌부와 마흔을 넘긴 늙은소의 눈빛이 보여 애잔하다.
예전 우리집에도 황소 누렁이가 나 와 내아우들의 학비에 일조를 하였는데...
정성을 다해 먹이와 청결을 강조하시던 촌부의 모습은 예전 울 아버지들의 모습이였다.
산자락 분홍 진달래 향기 맡으시며 이승을 하직하신 울 아바지,
2대 독자여서 그런지 엄청 자식들 사랑해 주셨던 아버지 얼굴이 오늘 이 산길에서 더 없이 떠올라
눈시울이 뜨겁다.
생각이 너무 깊은 탓이였을까?
쉬면서 벗어둔 선그라스를 그냥 놓고 왔다.
한적하던 능선에 2곳의 산악회 회원들이 연속으로 지나 갔으니 되돌아 간들 온전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을리 없어 그도 나 와의 인연이 오늘 여기까지라 생각하고 그냥 정상을 향해간다.
서릿발이 봄볕에 녹아 미끄러워 조심하며 정상에 올랐다.
다른곳에서는 느낄수 없는 막힘없는 조망이 첩첩 산줄기와 고을, 먹거리를 생산해내는 전답과 어울려
찰떡 궁합을 맞추었다. 허술하고 낚은 산촌의 삶이 깨끗하게 각을 지우며 사는 도회지 사람들은 불편해
할련지 모르지만 한줄기 빛이 쏟아지는 구멍난 지붕사이로 별이 쏟아지는 자연과 친해지는 풍광의 멋을 알까?
멍석에 펼쳐놓은 곡식에 후두둑 비가 내려도 조급하게 달리지 않는 넉넉한 "느림"이 저곳은 있을것이다.
정상의 요란함이 싫어 옆 봉우리로 가자 몇분이 점심 도시락을 펴기위해 필자 뒤를 따라와 사진 몇장을
찍은후 오봉사 방면으로 하산길을 잡았다.
봄으로 들어선 솔잎이 봄볕을 받아 연초록빛을 머금어 향기를 내보낸다.
수십길 벼랑끝에서 긴 겨울 가뭄을 이겨낸 소나무의 자태는 불황으로 백척간두에 선 이 땅 아버지들께
인내와 용기를 심어줄 요량으로 의연한 모습을 보이지만 작금 세속은 글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참담하기 그지없다. 내일은 또 누군가의 손전화에 "그동안 고생했다"는 문자가 뜨지는 않을련지...
신선도 노닐다 갈 만한 바위 벼랑에 앉아 필자는 봄을 맞고 있다.
산은 어느새 한무리의 섬으로 변해 필자가 앉은 작은 바위봉은 옥빛 물살에 둥둥 떠 있다.
세상이 하도 어수선하니 감동으로 다가오던 산그리메 마져도 물속으로 곤두박질하고 무인지경의 숲들은
자기들의 청정지역에 들어선 탐욕에 찬 인간들을 야단치며 내몰것 같다.
어쩌다 인간이 자연에게 마져 무시를 당하게 되었을까?
길게 가지를 내린 장송 아래 길손들 불러 앉히는 바위에 걸터앉자 바람이 풍경을 건드린다.
산 자락엔 또 생소한 "대한불교 미륵천지 대명사"와 무슨 보육시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 땅 산 좋은곳마다 저렇게 터 잡아 산을 깎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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