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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現場 속으로

1592년 임진년의 한산도 바다를 다시 보다.

 

 

     몇해전 몽골을 갔을때 800여년만에 부활한 징기츠칸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은적이 있었다.

     몽골인에게 "징키츠칸"은 꿈과 희망이며 삶의 전부다.

     드넓은 푸른평원을 겁없이 질주하던 3-5세의 징기츠칸 후예들의 마상 모습이 눈에 선하다.

 

     몽골인에게 "징기츠칸"이 있다면 우리에겐 성웅 이순신이 있다.

     1590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거쳐 명나라까지 정벌할 계획을 세우고 1592년 30여만명의 조선 침공군을 편성한다.

     이때부터 임진왜란 7년 전쟁이 시작된 것 이다.

     417년전 조선 바다의 제해권 확보와 명나라 정벌의 교두보인 서해 진출을 위해 와키쟈카 야스하루의 일본 수군은 견내량에 집결하였다는 제보를

     받은 이순신 장군은 견내량이 협소하여 속도전을 결행하는 일본수군에게 우리 수군이 불리하다는점을 간파하여 유인선을 보내 적선을 넓은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 세계해전사에 길이 남을 학익진을 펼쳐 섬멸한다.

     학익진이란 전술의 하나로 학(鶴)이 날개를 펼친듯한 형태를 취한 모습을 말한다.

     그 모양은 반원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이는 적을 포위하면서 공격하기 적합하기 때문이다.

     최초에는 일렬횡대인 일자진(一字陣)을 취하고 있다가 적군이 공격하게 되면 중앙의 부대가 뒤로 차츰 물러나면서 좌우의 부대가 앞으로 달려

     나아가 좌우에서 적군을 포위 공격하도록 되어 있다. 중앙에 있는 적군에게 집중적인 공격을 하기에 용이한 전술로 육지에서는 기병들이 주로  

     사용하는 전술이나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 앞 바다에서 기동력이 뛰어난 전선을 사용한 조선의 수군들이 사용한 전술이다.

    

     애향의 도시 이자 동양의 나폴리로 불릴만큼 수려한 경관을 지닌 통영시가 해마다 "1592년 임진년의 기억"을 되살리고 성웅을 기려 민족 자긍심을

     고취 시키고자 한산대첩축제를 개최해 올해로 48회째를 맞이했다.

     이순신의 날(8. 12. 수),통제사의 날(8. 13.목), 전통문화의 날(8. 14.금),한산대첩의 날(8. 15.토), 승리의 날(8. 16.일)로 세분하여 이순신 공원 및

     도남동 유람선 터미널. 케이블카장. 문화마당등지에서 개최되어 어제(8. 16.)폐막 되었다.

     특히 8. 15. 오후 7시에 펼쳐진 이순신 장군 공원앞 한산도 앞바다에서 펼쳐진 한산대첩 재현은 이 행사의 백미다.

     그 현장을 스케치해본다.(2009. 8. 16.)

                

      오후1시 개막 6시간전인데도 이순신장군 공원엔 관람객들이 모여있다.

      필자도 좋은 장소를 접하기 위해 이곳에 도착 장장 6시간을 기다리며 한산바다를 굽어보고 선 장군과 소통했다.   

     해경 헬기의 축하비행

    남해지방해양청 소속 제1503호의 축하 물대포가 한산대첩 재현의 흥을 돋우고  

      이어서 펼쳐진 강습훈련에서 해경 특수요원들의 진면목이 드러나 박수갈채를 받았다. 

      헬기에서 하강한 특수요원들이 선내를 침투하여 임무를 완수하고

      그리고 인명구조 시범 또한 환호를 받는다.  

      견내랑에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되는 적함대를 보고 있는 거북선 

       장군은 학익진을 펼치며 전함대에 공격명령을 내린다.

 

        417년후 한산도 거북선은 하늘을 날고

       학의 왼쪽 날개인 진영에서 공격의 불기둥이 솟아올라 한산대첩의 서막이 오른다.

 

       치열한 해상전은 장군의 학익진으로 조선 수군의 대승리로 끝난다.

       왜선과 왜구 약6천 - 9천이 수장되고(추정)임금의 불신과 반목의 대상이였던 공은 한산대첩으로 임진란의 종식을 앞당겨 백척간두의 나라를 구한다.

       권율의 행주대첩, 김시민의 진주대첩과 함께 한산대첩은 임진란 3대첩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