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강 과 촉석루 . 영남제일의 명승루 한때는 국보로 지정 되었으나 6.25때 불타 중수된후 지방문화재로 지정 되었다.
진주의 역사는 진주성으로 부터 시작 된다고 해도 이견이 없을것이다. 따라서 남강의 도도한 물살이 천년의 역사와 함께 오늘도 쉼없이 푸르게 흘러가고 있다. 임진왜란의 중심엔 불멸의 이순신이 있었다면 진주대첩의 중심에는 진주목사 김시민장군과 김천일 장군이 있었다. 진주성내는 지금은 성역화 사업으로 잘 정돈 되어 있었지만 60년대 후반 까지만 해도 성안에는 낚은 주택과 상점들이 즐비해 대첩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지를 못했다.
▲ 영남포정사. 조선조말 경상남도 관찰사의 선화동 관문(감영의 정문)으로 일명 망미루라고도 부른다. 진주부에서 1925년 도청이 부산부로 옮겨 갈때까지 그 문루로 영남포정사라 이름을 붙였다. 현재 경남도청이 창원으로 오면서 위 영남포정사와 똑같은 건물을 창원시 용지공원에 세웠다. 경남도청이 부산으로 옮겨지기전 까지 도청의 정문
3천8백의 군관민이 왜군 2만과 대적한 진주성 싸움은 임진란 최초로 성을 지켜낸 대첩이다. 목사 김시민장군의 탁월한 전술과 인화.김천일 장군의 용병술과 친화력이 6일간의 치열한 전투를 승리로 장식하여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기록 되었다. 김해.고성. 창원등지에서 잇따른 패배로 고심하던 왜군은 경상우도의 주력군이 진주성에 주둔해 있다고 판단하여 전세만회를 일시에 할수 있을거라 판단하고 1592년 10월5일 등원랑.평조신등을 주축으로 김해등지에 주둔해 있던 3만의 정예병과 최신식 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하여 침공한다.
북장대로 가는길. 그 날 그 아픔을 달래 주려는듯 담쟁이가 성벽을 온통 덮혀 숙연하게 하고 아픈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사람들이 오가는 대(臺)에 웃통벗은 어떤 몰골이 서글퍼다.
진주성은 외적을 막기위해 삼국시대 부터 조성한 성으로 고려말 우왕 5년(1379)에 진주목사 김중광이 잦은 왜구의 침범을 대비하여 토성을 석성으로 고치고 임란 직후는 중앙에 남북으로 내성을 쌓았다. 1592년 10월 선조25년 진주대첩을 이뤘으나 이듬해 6월 왜군 10만명이 다시 침략 해와 7만 민.관.군이 이에 맞서 싸우다 모두 순국한 비운의 성이다.
국립 진주 박물관 1984년 11월 개관 하였으며 1998년 임진왜란 전문 역사박물관으로 재 개관 임진왜란 유물 800여점이 전시되고 있다.
서장대로 향하는 발걸음이 잠시 멈춰선다. 대낮 그것도 시민들의 휴식처인 성내에서 젊은 연인들의 애정 표현은 도를 넘었다. 길손이 민망하여 얼른 고개를 돌리고 무안하고 민망해 돌계단을 뛰어오른다. 영화의 한 장면이라도 가위질이 될 법한 장면을 목도한 중년.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표현의 자유가 저런 것 일까 ????????
서장대.
남강.
촉석류와 진주교 그리고 남강 돛배
옛 빨래터. 60년대말 아니 70년대초 까지만 해도 이곳엔 아낙네들이 큰 솥을 걸어놓고 즉석에서 빨래를 삶아 씻던 빨래터다. 아 이곳에 빛바랜 흑백사진 한장이 있었네
논개의 구국정신이 절절히 맺혀있는 촉석루 및 의암. 그 날 그 숨결을 들어 볼려는지 연인들이 바위에 닿아있다. 좌측 벼랑과 우측 의암이 맞붙으면 나라에 큰일이 일어난다는 속설이 전해옴을 지금껏 무시했지만 오늘 바라보니 예전 그 때보다 간격이 많이 좁혀진것 갔다. 무슨일이 일어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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