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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마여행

서해(西海)로의 여행

서해(西海)로의 여행(1)
추억은 회색빛 파도로 밀려오고...
2006. 6. 17-18.


결과만 과정을 합리화 시키는 황당한 일들이 주변에 늘 발생한다.

그 결과에 따라 과정은 힘없이 무너져 묻히고 해결할 그 어떤 엄두도 못낼때 나는 늘 혼자였다.

최소한 본인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고 누굴 황망히 내버려 둔 일도 없는데도 유독 본인만 무슨

일을 당하면 언제나 혼자다. 설움이 비가되어 목젖을 타고 내린다.

이런 순간을 잠시나마 잊을수 있는것은 역시 산으로의 만남이 아닐까?

무릅이 날세운 바위에 무수히 받혀 선지피가 펑펑 솟아나듯 고통스러운 산길이어야  비로소 위안

이 된다. 그러나 나는 오늘은 산으로 갈수가 없다.

 

 

여행이다.

고통이 동반되는 혼자의 산길이 아닌 학창시절 수학여행 같은 설레임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그런

길 떠남 필자는 오늘 잊어버린 그런 길을 떠나보기로 했다.  

길은 있어도 아무나 발디디지 않는 길은 없을까?

한번도 내 발길이 닿지않는곳은 수도없이 있는데 ...

그러나 그곳에도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었고 낮선 길손마져 반긴적도 있었다.

바다가 있는곳.

푸른물결이 겹겹으로 포개지며 흰거품을 말아 인간의 오랜 바램처럼 뭍으로 끝없이 달려가는곳

그곳은 고래가 숨을쉬며 사는 동해다.

쪽빛 물빛이 가슴을 열어 수많은 섬들과 기암을 둥둥 띄우며 덩실덩실 춤을 추는곳 그래서 남해

는 떠다니는 무수한 섬들이 모여 있어 다도해라 부르겠지

그렇다면 회색빛 추억이 발등을 간지르며 소라고동의 연시 보다 더 아름다운 연인들의 밀어가

숨마져 멎게하며 밤을 지샐때 서해의 고즈녁한 해변은 별을 하나 둘 세어 담으며 누워 있다.

 

 

 

서해(西海).

애시당초(애당초)인간들은 서해를 아주 만만히 보았다.

날마다 서해를 책상위에 올리며 선(線)을 그으댄다.

심장인 갯벌을 線으로 하나 둘 죽이더니 결국 서해는 물빛마져 회색으로 바뀌었다.

천수만.새만금. 등등

이들을 향해 천문학적인 돈이 덤프트럭에 실려 바다에 빠져 허우적 거린다.

바다의 심장이 말기암으로 죽어 가는데도 그들은 개기름핀 얼굴에 느끼한 웃음을 흘리며 번영

이라고 떠들어대더니 서해안 시대의 시작임을 자성(自聲)한다.  

서해는 그래서 심장이 뛰지않아 노도같은 파도를 말아 뭍으로 보낼 여력마져 없다.

 

 

서해로의 여행길에서 처음 만난곳

수덕사 와 덕숭산

어떤이가 수덕사에 가면 일엽이 떠오른다고 했다.

무지한 필자는 일엽이 여기서 수행한줄을 몰랐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이화학당을 나와 일본에서 유학한후 귀국해 신여성 잡지를 발행하고 

수덕사의 견성암에서 스승 만공을 만나 붓까지 꺾고 비구니로 출가한 그분의 이야기가 최소한

여기서는 전설이다. 허긴 그가 집필한 청춘(청운)을 불사르고를 읽은적이 없으니 ...

그러나 필자는 어릴적 누나가 즐겨 부르던 수덕사의 여승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인적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속세에 두고온 님 잊을길 없어  

법당에 촛불켜고 홀로 울적에/아^아^아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늘어선 솔밭의 평화로움

덕숭산자락에 놀터까지 갖추고 물욕에 먼 중생들이 무수히 기어 오름에도 우둔함을 내색하지

않고 자비의 깨침을 부지런히 설파하는 수덕사는 비구니들의 도량은 아니다. 

일주문을 들어서기전 필자는 또 하나의 전설을 만난다. 수덕여관이다. 경내와 담하나를 사이에

두고 소재한 수덕여관은 초가집으로 지금은 주인도 객도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당대의 내노라하는 시인.화가. 묵객들이 머물던곳 여기서 여류작가인 일엽(김원주)과 스님(만공)

일엽의 친구 나혜숙.김활란.그리고 화가 이응노 일엽의 아들 김진태의 운명적인 만남과 이별이 

있으니 3여자와 3남자의 전설이 대서사시로 머물고 있다.   

 

 

 

 

일제 강점기 신교육을 받은 일엽은 일본 유학중 유부남과의 통정으로 이혼을 당하고 일본 명문가

의 청년과 열애로 사생아를 낳으니 그가 김진태다.  모정이 그리워 찾아온 아들에게 "나를 어미로

부르지말고 스님으로 불러라는 냉정한 말에 부르조아 창녀라는 칭호를 얻은 나혜숙은 친구의

아들에게 젖가슴을 내어 만지게 한 이유도 여기에 묻어있다. 그도 당시 세아이의 어머니였다.

일엽은 친구의 애인과의 삼각관계. 나혜숙은 독일 유학파 백아무개와의 이루지못한 사랑에 예전

친구인 일엽에게 종교를 현실 도피의 수단으로 삼지 말라고 충고했지만 자신도 현실과의 아픔을

접기위해 친구 일엽처럼 비구니가 되기위해 이곳을 찾아와 만공에게 출가를 종용했지만 너는 중

이 될수도 되어서도 안된다는 진노에 발길을 돌려 다른곳에서 비구니로 속세와 인연을 끊는다.

그리고 이들은 이응노 화백과의 운명적인 만남도 이곳에서 전개 된다.

 

약간 흥분된 마음으로 여관안을 들어서자 마당 한켠에 높게 서 있는 굴뚝에 담쟁이 덩쿨이 흐른

세월의 무상함을 대변하듯 높이 솟아있고 잡초 우거진 마당을 아낙네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김을

메고있다. 한때는 이곳이 수학여행지의 숙소로 사용되기도해 그때를 살아온 사람들은 아마 전설

같은 추억가슴에 담고 이곳을 찾아올것 같다. 모두가 개화기 시대의 신 여성으로 돌아가 일엽

과 나혜숙 두 페미니스트를 동경 할련지도 모른다 여기 이 분위기는 ...

 

 

수덕여관 안마당의 굴뚝

 

 

수덕사는 천년의 미소로 사람들을 반긴다.

수덕사에 대한 창건 역사는 문헌이 없어 학계서는 백제 위덕왕(554-597)재위시로 추정한다.

그 후 고려 충렬왕 34년(1308년)에 건축된 대웅전이 잔잔하고 엄숙한 고색의 분위기를 연출

하고 대웅전앞 통일신라의 만기 양식을 모방한 삼층석탑이 중생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수덕도령과 덕숭낭자의 애잔한 사랑이 담긴 수덕사의 전설을 뒤로 하고 미움도 탐욕도 물한모금

에 내려놓고 간월도가 있는 서산으로 향한다.

참고로 수덕사 내 견성암은 일엽이 수행한 곳으로 지금도 우리나라 최대의 비구니 수행처란다. 

 

 

 

고색빛속에 엄숙함이 베어나는 대웅전과 삼층석탑. 대웅전뒤가 덕숭산이다. 

 

 

 

길에서 두번째 만난 간월도

서산.

귤을따라 전복을 따라 서산 갯마을로 시작되는 정겨운 유행가 조아무개씨의 서산 갯마을 현장.

70년대 수없이 겪던 배고픔의 설움을 달래보고자 간척지(농지)조성을 위해 바다의 심장인 갯벌을

막은 대표적인곳이 바로 이곳이다. 물론 그때는 배고픔의 설움이 더 커 갯벌의 중요성은 아무도

인지하지 못했고 설혹 갯벌의 중요성을 안다고 해도 통치자의 마음을 바꿀 간 큰 사람은 그 당시

로는 아무도 없었다. 물론 지금도 대법원의 심리로 막을내린 새만금은 국민혈세 수백조를 바다에

들어붓고 있으며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위정자들은 지도를 바꾸었다고 자랑한다.

간월도는 천수만 방조제로 생긴 섬.

밀물때는 작은 섬이 되지만 물이 빠지면 바닥이 드러나 통행이 자유롭다.

이곳 간월도는 섬 전체가 간월암터다. 적멸보궁도 아니면서 대웅전 지붕이 특이하게 청기와다.

간월암은 이성계의 왕사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수행할때 "달을보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날도 타지역 신도들의 발길이 물줄기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간월암 대웅전.

 

 

간월도의 오후. 아이의 추억을 담는 엄마의 마음이 바다를 닮았다.

   

 

해가 진다.

삼길도로 가는 7.8km 대호방조제 둑 아래 꽃길로 지는해가 소나기로 내린다.

일상을 잠시 또 뉘이려 갈 시간 작열하게 하루를 뜀박질한 해는 당진 발전소 철탑위로 마지막

남은 붉은빛을 소진하며 모처럼 산길이 아닌 신작로를 내 달려 낮선땅에서 하루 저녁을 맞는

길손을 위안한다. 붉은빛 통채로 받은 작은배들이 그림처럼 떠 있다. 여기는 삼길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