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묵은 추억을 더듬어 가는길에 약간의 흥분이 인다.
그것도 뱃길이 아닌 육로로 유년의 기억과 동행하는 오늘.
날씨도 희뿌연 안개를 사방 흩어놓아 길손의 오래된 추억마냥 흐릿하다.
남해 창선 장곶이(장포).
부잣집 선주의 외동딸로 태어나 울 아버님께 울면서 시집오신 내 어머님의 고향 즉 길손의 외가 가
있는 작은 포구의 갯마을. 그곳엔 낚은 목선처럼 길손의 추억이 둥둥둥 떠 있다.
▲ 도선 선착장. 단항까지 사람과 차를 실어나르던곳.
장곶이.
지금은 자동차로 1시간 정도면 충분하지만 예전 이곳을 갈려면 꼭 한나절이 걸렸다.
아침 일찍 고향집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덜컹거리는 신작로를 30여분을 달려 사천에 닿아 다시 진주
에서 내려오는 삼천포행 버스를 줄창 기다려 탄후 삼천포 정류장에 내리면 반나절이 지난다.
서둘러 여객선이 있는 선창으로 잰걸음을 옮겨야 여객선(초등1-3학년때는 목선. 그 이후 철선 선명 :
창성호 인지 창선호인지 아득함)을 탈수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희한한게 내 어머님은 자동차는 출발하여 5분만 가도 심하게 멀미를 하시는데 배는 하루
종일 타셔도 멀미를 안하시니... 역시 섬 사람 그것도 김약국의 딸이 아닌 김 선주의 딸이시다.
여객선이 가고오던 선착장엔 갈메기가 사람처럼 모였다.
지금도 운영하는 제일냉동(제빙공장)에서 고기상자로 무수히 떨어지던 얼음조각이 흰 포말로 보여져
어린 마음에 몇개를 입안에 넣어 으드득 깨어 먹고싶은 충동을 갈때마다 느꼈다.
그러나 지금 필자가 여객선을 타기위해 건너던 선착장은 오래전에 사라졌다.
적량과 장곶이로 억척스런 섬 사람들을 실어나르던 여객선은 심한 운영난에 시달리던중 자동차가
대중화되자 사람만 실어 나르던 여객선은 차가 다닐수 없는 섬으로 이동해가고 이곳엔 늑도옆 단항을
잇는 도선(사람+차)이 생겨 여객선에서 아득히 보이던 코섬 그리고 죽방림을 눈앞에 데려다 줘 또 다른
볼거리에 기분이 좋았다. 그때도 갈메기는 도선 후미에서 부서지는 흰 포말을 따라 쉼없이 날개짓 하며
어린애 젖달라 보채는 애절한 울음마냥 서러운 소리를 내며 따라왔다.
※ 물론 70년대초 남해대교의 등장으로 남해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시작 되었지만 ...
▲창선을 가기위해 도로에 줄줄이 서있던 차량행렬들은 사라지고 멀리 삼천포대교가 보인다.
▲ 멀리 죽방림과 코섬이 멀게 보인다.
▲ 흰 포말처럼 고기상자로 쏟아져 나오던 제빙공장의 얼음. 아이스케키가 귀하던 그땐 내겐 또 하나의
추억의 장소다.
인생무상일까?
사람과 자동차를 싣고 새로운 추억과 사랑을 실어 나르던 도선들 마져 몇해를 버티지 못하고 혁기적인
동남해 시대를 연 연육교들에 밀려 또 다른곳으로 선수를 돌리고 말았다.
이제 또 코섬과 죽방림은 사람들의 눈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이젠 아스팔트와 시멘트의 둔탁한 추억만 쌓여 갈 것이다.
▲ 도선이 닿던 단항. 사람과 차들로 한 시절을 풍미했던 그곳에 태공이 세월을 낚고...
아 !
적량으로 가는 고개에 서면 가슴까지 확 터이는 장곶이앞 그 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회색빛에 바다인지 하늘인지가 구별이 되지 않지만 외가 소유의 모섬이 변치않고 점 으로 떠 있다.
외사촌 형제들과 가느다란 대나무에 낚시줄을 메어 던져도 감성돔 도다리 노래미 우럭 볼락이 손바닥에
물집이 생길 정도로 연이어 올라오던 그 시절 그때를 우리는 물반 고기반으로 표현해야 했다.
그리고 물빠지면 징그럽고 무섭게 보이던 해삼 과 석류를 닮은 멍개 문어 낙지도 어김없이 외숙모의 손
에 들려져 있었다. 이른 새벽 외삼촌을 따라 바다로 가면 동 터오는 모섬앞 목선(땟마)에서 바라보는
사랑도 저 편 일출 바다의 풍광은 신년초 흙벽에 붙어있던 한장으로 된 국회의원 구 아무개씨의 달력의
그림과 어찌나 닮았던지...그때 새처럼 작은 내 가슴에도 희망의 메세지로 다가 왔을게다.
막 바닷물을 밀치고 올라오는 붉은해 사이로 만선의 꿈을안고 바다로 가는 작은배와 뱃전에 갈메기가
날아오르는 달력의 그림같은 모섬앞 일출 바다를 본지가 어느듯 수십해가 되었다.
▲ 고갯마루에서 내려다 본 적량 앞 바다와 장곶이 앞 바다.
필자의 추억이 시작되는 모섬이 점으로 떠있다.
적량.
삼천포항 선창에서 출발한 여객선이 장곶이(장포)를 가기전 제일 먼저 도착하는 이웃 동리다.
긴 뱃고동이 갯가를 울리면 선창으로 마을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든다.
새벽 객선으로 어제밤까지 잡은 생선과 해산물. 밭에서 채취한 마늘 고구마등을 육지에 내다판 옆지기.
누이. 며느리가 바리바리 생활품들을 사서 들고오는 짐을 받아가기 위해서다.
선창은 만남과 이별도 난무하지만 사람과 사람 이웃과 이웃 그리고 가족들이 함께 나누는 따뜻한 정이
녹녹히 묻어나는곳이다. 선창은 안개짙은 새벽이 더 운치가 있다.
참 오랫만에 이곳에서 휴식하는 배밑을 정비하는 노 부부의 모습을 볼수 있었다.
예전 외가에서도 배 밑 목재에 구멍을 내어 부식케하는 벌레를 잡기위해 불을피워 태우고 구멍난곳을
땜질한후 골탕(폐유)을 바르던것을 본적이 있었다. 아마 페인트값을 아끼기 위한 수단이며 방수의
한 방편 이었을 것이다. 노 부부와 수십년을 함께 해 온 저 배는 자식들을 객지로 유학보내고 혼인을
시키는데 단단히 한몫을 해내고 머지않아 영광스럽게 퇴역할 것이다.
그간 태풍에 목숨을 건 사투도 있었을 것이고 백척간두의 위급 환자를 싣고 칠흑 같은 밤바다를 파도와
싸우며 숨죽이며 헤쳐도 갔을것이다. 저 배는 저들의 분신이다.
어머니 !
오늘 저는 어머니가 댕기머리 시절 대바구니를 옆에끼고 또래 아이들과 갯가의 비탈진 척박한 밭을
다니시던 그 길에 서 있습니다.
길이 어머니가 다니시던 그 길이지만 예전 그 길은 아닙니다.
리어카 한대가 겨우 다닐수 있던 어머니의 길은 이제 아들이 타고 다니는 차 2대가 서로 손 흔들며 지나
치는 큰 길이 되었습니다.
처음 이 놈을 데리고 간 외할머님 버선발로 나오시던 돌담 너무도 보기좋던 옛 집은 형체도 없이 사라
지고 때깔좋은 슬래브지붕의 주택으로 변해 지나가는 날 쳐다보고 있습니다.
갱변도 그 아름답던 갯가의 은빛 보드라운 모래도 우리 인간이 수월하게 살기위해 만들어 마구 사용한
온갖 생활용품의 공해에 뭇매를 맞아 점차 회색빛이 되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손수건 연신 눈가로 가져 가시며 당신의 치마속 허리띠(줌치)에 몇번씩 접어 보관한 돈을 딸에게 쥐어
주시며 눈에 보이시지 않을때까지 돌처럼 서서 손흔드시던 외조모님 과의 만남과 이별이 있었던 선창.
그때 어린 저도 많이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외조모님과 어머님의 1년만의 해후가 있었던 외가앞 선창.
이곳 선창도 더 이상 정 넘치는 아름다운 이별도 어머니가 끝이셨나 봅니다.
아흔을 훌쩍 넘기시고도 어머님과 영원한 이별전까지 당신의 딸 건강을 걱정하시던 외조모님은 아마
지금도 여든 다섯의 딸인 어머니의 건강을 빌고 또 빌고 있을것 입니다.
선창엔 오늘 아들 혼자만 해묵은 추억을 건지고 있습니다.
▲ 내 유년의 추억이 떠다니는 장곶이 마을.
▲ 우측 섬 끄트머리 외가 소유의 모섬이 정겹다.
▲ 어머님의 어릴적 놀이터로 짐작되는 외가 앞 갯가(어머니는 갱변이라 불렀다)
▲ 내 어머님과 외조모님의 만남 그리고 이별이 있었던 선창.
모상개.
천혜의 해수욕장으로 더 이상 여름날에는 필자의 몫이라고는 없는곳이다.
타지에서 몰려드는 피서 인파로 모상개는 해마다 몸살을 앓고 있기 때문(제발 올해는 자기 쓰레기
꼭 챙겨 청정 모상개 해수욕장을 보전하는데 앞장들 서시도록...)
해수욕장이 뭔지도 모르던 그 시절 외사촌들과 벌거숭이가 되어 모래탑도 그리고 두꺼비에게 묻던
헌집.새집 놀이도 이곳에 있었다. 한 여름이 되어도 교통 수단이라고는 여객선이 전부였던 그때 감히
낮선곳 이곳으로 여행을 떠나올 엄두나 내었던가? 전역후 잠시 몸 추스릴때 후배와 건너와 국방색
텐트안에서 기울이던 막소주의 향이 갯내음이 되어 코끝을 스쳤다.
막소주와 달빛 갯내음에 만취되어 바다를 향해 밤새 목 터져라 불렀던 유행가가 아무리 생각해도 통
기억이 없다. 모래탑도 해변의 여인도 불렀을까?
장포는 모섬을 중심으로 모상개 주변의 해변은 단연 남해중에서도 으뜸이다.
부산 모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는 외사촌 아우는 제자들의 여름나기를 직접 지원하기 위해 "일월애"
라는 팬션1동을 모상개가 코앞인 매실나무밭에 지어 방학때면 학과 아이들과 지내더니 오늘 와서보니
여러동이 지어져 팬션촌이 되어있다.
딸아이와 낚시대를 드린 저 태공은 아이에게 추억도 낚게 할 것이다.
저런 광경을 볼때마다 아비와 변변한 추억하나 만들지 못하고 먼곳 떨어져 사는 내 딸이 무시로 그립다.
갈래머리 땋아 학교 보내던때가 엊그제 같은데 아이의 엄마가 되어 날마다 아비의 건강을 묻는 문자라도
오지 않으면 서운한걸 보니 필자도 나이가 들긴 든건지...
아마 내 딸 아이도 내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이곳을 왔던것처럼 내 손을 잡고 따라 왔을게다.
그러나 그 아인 아버지의 추억이 있는 장곶이 보단 딸 아이의 추억이 묻어 있는 남해가 간간히 생각이
날 것이다. 내가 눈감으면 모섬이 떠오르듯 그렇게 말이다.
올 여름을 나기 위해 아직도 어느곳을 가야 할지를 정하지 못했다면 남해 창선 장곶이도 정말 좋다.
해변의 기암.
호젓한 선창.
저음으로 내려앉아 파도와 속삭이는 긴 방파제와 등대불빛.
이른새벽 붉게 타오르는 모섬옆 일출.
모상개 백사장에 떨어지는 별을보며 해변을 적셔가는 밀어.
분명 장곶이엔 낭만과 꿈이 섬 처럼 떠-다닐것이다.
남해군 창선면 장포리 장곶이. 올 여름 꼭 한번 만나보시길...
가는길
사천나들목을 나와 삼천포항 방향 3번국도를 따라 삼천포대교 초양 늑도 창선대교가 있는 연육교를
지나 창선면 소재지인 수산에서 좌회전(굴다리)하여 공룡화석지 가인마을 우측을 지나 적량에서
우측으로 길따라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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